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배운 ‘사랑의 사명’

<사랑의 사명>을 펴낸 로저 콜 박사는 잘나가는 의사였다. 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성공과 인정에 대한 야망, 자신의 이익,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런던의 킹스 칼리지 의대에서 공부한 그는 ‘환자들의 고통과 거리를 두고 개입하지 않는 법’도 익혔다. 환자를 돌보는 일을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남을 돌보면 왠지 자신이 쉽게 상처받을 것 같았다.

경쟁적이고 학구적인 환경의 시드니 왕립 프린스 알프레드 병원으로 옮긴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성공에 매달렸다. 결과는 좋았다. 내과 전문의 특별 시험에 합격, 시험 없이 암 분야의 특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최고의 목표를 달성한 터라 집중도 안 되고 기력도 쇠했죠. 목표가 없으니 공허해졌고, 발버둥치면서 새로 올라갈 산을 찾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가 찾은 ‘새로운 산’은 그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환자 돌보기’였다. 그는 환자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암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죽음을 직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말이다.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가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서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매우 뜻깊은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들은 내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요. 사랑을 찾고 보니 의사의 능력과 연민의 정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사랑의 사명>은 로저 콜 박사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한 여정과 그에 따른 통찰이 담겨 있다. 여기 30대 후반 피부암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 암이 발병해 머지않아 죽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 베로니카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 어린 두 딸, 좋은 직장을 둔 그녀는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긍정적인 태도와 생활양식을 가지면 암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은 그녀는 식이요법, 명상 등 대체요법을 활용했다. 그녀는 언젠가 때가 되면 암들이 사라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과 긍정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암은 가차 없이 자랐다. 베로니카는 절망감을 쏟아냈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한순간도 제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제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저는 실패했어요.”

패배감에 빠진 그녀에게 로저 콜 박사는 물었다. “암을 겪으면서 무언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나요?” 놀란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리곤 생각에 잠겼던 베로니카가 대답했다.

“이제는 딸애랑 훨씬 가까워졌어요. 전에는 자주 다투었는데 그동안은 정말 훌륭했어요. 아이가 갑자기 철이 든 것 같아요. 얼마나 섬세하고 잘 배려하는지….”

“남편은 사실 제가 암 진단을 받기 전엔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굉장히 잘해주었어요. 이제는 진짜로 친밀해졌어요. 정말 멋진 일이죠.”

“전에 비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고 소박한 데서 만족을 더 찾게 되었죠. 훨씬 더 베푸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작년 한 해 암을 겪으면서, 우리는 많이 성장했어요.”

이를 두고 로저 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암을 없애는 데만 몰두해서 이런 일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직 암을 치료하느냐 못 하느냐, 죽느냐 사느냐를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삼았기 때문에 진정한 치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거죠.”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런 ‘평안’은 진정한 치유에서 온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치유의 힘은 ‘사랑’에서 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간구한 것이 한 예이다.

“예수의 이러한 간구는 자비를 간단하고도 완벽하게 표현한 예입니다. 육체 의식은 우리의 ‘눈을 가려’ 사랑과 진실에서 우리를 떼어 놓아요. 우리를 속이는 거죠. 거기에 두려움과 불신이 싹트고, 우리의 인식을 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 자신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게’ 되어버리죠. 영적인 통찰력은 인간의 취약성이 여기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죠. 그래서 예수는 자비의 시선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용서했던 것이죠.”

이런 마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비난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용서의 자세라는 것이다. 이런 자비의 시선에 의해 사랑이 사회에 전파되고 퍼져 나간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사명’이다.
그런데 로저 콜 박사가 던지는 한 가지 질문은, 인간은 왜 죽음에 이르러서야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느냐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베로니카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죽음을 인식한 후에, 예수를 더 친밀하게 느꼈다고 고백했다. 신앙인이건, 아니건,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육체의 욕망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치자. 사람들이 지금처럼, 돈을 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용서가 안 되는 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학대하는 것으로 일주일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사명을 깨닫는 일을 어렵지 않다. 딱 일주일만 허락된 것처럼,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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