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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도 햇빛 찬란한 날들이기를…
햇빛 찬란한 시절을 찾아가는 <써니>의 주인공 나미에게
[109호] 2011년 06월 05일 (일) 옥명호 @

 

 
   

 

“꽤 오랫동안 엄마, 집사람으로만 살았어. 나도 역사가 있는 인간인데….”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성장의 역사를 지닌 인간이자 자기 생의 주인공입니다. 이미 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보았다는 <써니>에서 나는 당신의 치열한 성장사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과 나는 엇비슷한 40대일 텐데, 꼬막의 고장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 간 당신과 달리 나는 멸치의 본산 거제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더랬습니다. 나이키 운동화에 나이키 가방 정도는 들어줘야 했던 그 시절을, 나도 보냈습니다. 아, 물론 한반도 아랫자락의 우리 또래들에겐 프로스펙스조차 언감생심이어서 날렵한 로고만 비슷한 나이키(Nike) 변조 브랜드 ‘나이스’(Nice)를 신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조용한 범생이들과 어울리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곤 하던 나와 달리, 당신은 전학 간 지 얼마 안 되어 전교짱 춘화가 이끄는 육공주 멤버가 되었지요. 그 시기 내 가까운 친구 중 하나는 <데미안>이었는데, 이 유명한 구절을 당신도 알리라 생각합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당신네 멤버들처럼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와 비상하려는 영혼의 투쟁기를 보내는 법이지요. 그 음울한 성장통의 시간을 햇살 가득한 날들로 뒤바꾸는 건 당신네 칠공주 그룹 ‘써니’ 같은 친구들일 겁니다. 꽤나 까칠하고 삐딱하게 구는 중학생 딸을 둔 엄마로, 명품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하는 사업가의 아내로, 드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무탈하게 지내는 지금의 당신에게, 그 시절은 햇빛 찬란한 나날로 기억할 만했더군요.

전라도 벌교에서 올라온 당신은 몸조심, 말조심에 맵시까지 조심하지만, 재채기보다 감추기 어려운 게 바로 촌티라는 걸 당신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놀림거리가 되어 괴롭힘을 당하려는 찰나, 육공주의 짱 하춘화가 구원의 기사가 되어줍니다. 그날 이후, 당신을 신입멤버로 받아들인 육공주는 비로소 ‘써니’라는 이름의 칠공주 그룹이 되지요. ‘소녀시대’ 패거리와 맞짱 뜨는 자리에서 평소 할머니에게 들어온 초절정 쌍욕을 오리지널 사투리 버전으로 연사하여 소녀시대를 초토화한 장면은 지금도 웃음이 나는군요. 친구와의 갈등도, 왈패들에게 당한 모욕도, 대학생 오빠를 향한 짝사랑의 열병도 ‘써니’가 있었기에 햇살 가득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수 있었겠지요. 학교 축제 때 일어난 사건으로 뿔뿔이 헤어지게 된 써니 멤버들이 무려 25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는 건 춘화 덕분이었습니다. 당신이 친정엄마 문병 간 병원에서 만난 춘화가 시한부 투병중이었던 거지요.

“너 보니까 보고 싶다, 써니.”

춘화의 그 한마디에 당신은 써니의 멤버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추억여행은 25년 전 과거와 현재가 무시로 만나고 뒤섞이며 관객들의 가슴을 알알하게 추억으로 물들여갑니다. <써니>에서 40대 남자의 가슴을 울린 장면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건 과거 속의 나미가 상처로 우는 자리에 40대의 나미가 다가가 아무말 없이 따뜻이 안아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과거에 묶인 채 성장하지 못하는 시간을 해방하는 건 과거에 대한 현재의 위로임을 말하려는 듯, 침묵 속에서 ‘울지마. 괜찮아, 나미야. 괜찮아’ 하고 10대의 나미를 다독이는 위로의 말이 생생히 들리는 듯했습니다. 저마다 사연은 달라도 누구나 눈물 짓는 과거가 있는 법이잖겠어요?

   
<써니>의 당신에게 못내 아쉬운 게 있다면, 당신의 이야기가 80년대 여고시절 추억담으로만 그친다는 점일 겁니다. 그만으로도 동시대의 추억을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난 당신이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써니 멤버 ‘임나미’의 꿈을 찾아가는 또 한번의 성장 혹은 비상을 기대했나 봅니다. 엄마, 아내를 입주 가정부쯤으로 여기는 듯한 당신의 딸과 사업가 남편에게 멋지게 자아찾기 선언을 하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기업가이자 재산가였던 춘화가 죽으면서 남긴 은택으로 써니 멤버들의 인생 문제가 한방에 해결되는 방식도 해피엔딩의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분명 <써니>의 햇빛 찬란한 시절의 주인공은 당신네 칠공주였습니다. 그 시절뿐 아니라, 어느덧 40대가 된 당신과 나의 지금 이 순간도 햇빛 찬란한 나날(sunny days)이기를 소망합니다.

※ <써니>, 유호정/심은경(임나미), 진희경/강소라(하춘화), 고수희/김민영(김장미) 등 주연 / 강형철 감독, 2011. 5. 4.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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