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이성호 교수의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21가지 말>(이너북스)을 서점에서 골랐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제목이었는데, 이 책을 펴들고선 더욱 좌절하고 만다. 나는 겨우 한 마디 정도만 범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일상에서 되뇌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이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버린 아이는, 이제 아빠를 멀리한다. 아홉 번 따뜻하고 한 번 차가우면, 아이는 그 한 번을 마치 열 번처럼 기억한다. 밤샘 작업이 있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 아이는 오히려 반기는 눈치다. 참고 참다가 한 번 잔소리를 하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피해 버린다. 대들면 차라리 좋겠는데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나는 아이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휑한 적막감에 어쩔 줄 모른다. 막혀버린 듯하다.

이제는 두렵다.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두렵고, 지켜보기도 겁난다. 아이와 나 사이에 막힌 담을 느낀다. 이런저런 까닭을 나열해 본다. 15년을 살아오는 동안 아이는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그 벽을 쌓았는지 모른다. 아니 아이가 아니라 아빠가 쌓았는지 모른다. 내 딴에는 친절한 척, 모든 걸 이해하는 척, 뭐든 용서하는 척, 그렇게 좋은 아빠인 척했지만 그 ‘척척’ 하는 행동 속에 거짓이 담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령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I 대화법’이니 하는 고상한 대화의 요령을 실천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 게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너 하나였으면 어쩔 뻔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분명히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슬프다는 말이다. 좀 더 확장하면 너 같은 아이를 낳은 걸 후회한다는 말이다. 세상에,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한 번도 들은 적조차 없는 그 무서운 말을 언감생심 아비라는 인간의 입으로, 터진 입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예민한 아이에게, 제게 닥친 스트레스를 이겨내기도 어려운 아이에게, 그리 말하고 말았다. 뒤주에 제 자식을 쳐 넣어 죽게 만든 그 독한 애비와 무엇이 다른가.

작년에 한 시사 주간매체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절반에 육박하는 49%의 청소년들이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고 응답했다. 그 중 5%, 그러니까 100명이 다니는 학교라면 5명은 1주일에 한두 번 자살을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세상에…, 누가 뭐래도 이런 세상은 지옥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 5명에게만 지옥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까닭을 알아보면 경제사정(22%), 부모님 꾸중이나 잔소리(17%), 가정불화(8%)…, 그러니까 절반 가까운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유로 말미암아 자살충동을 느낀다. 여기에다 성적에 대한 고민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는 21%까지 더하면 60%에 달한다. 부모가 되어 하는 짓이 이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 속에 아마 나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있을 게다. 세상에, 아비란 사람이 “너 같은 자식은 낳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어찌 죽고 싶지 않았을까.

한심한 노릇이다. 그래서 이성호 교수의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21가지 말>(이너북스)을 서점에서 골랐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제목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펴들고선 더욱 좌절하고 만다. 나는 겨우 한 마디 정도만 범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일상에서 되뇌면서 살고 있었다.

“머리는 무거운데 왜 달고 다니냐?”
“이제 방에 들어가서 공부 좀 하지?”
“너도 이 담에 더도 덜도 말고 너 같은 새끼 한번 키워봐라.”
“네가 그걸 한다고?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어쩌면 21가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해댄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아이 앞에 서기도 두렵고, 차라리 아비란 인간이 자살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도 스쳐간다. 오히려 더욱 아이 마음을 배려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런 예화가 나온다. 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을 둔 엄마가 있다. 주일 아침인데 일찍 일어난 딸이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있다. 엄마가 묻는다.

“너 오늘도 학교 가니?”
“아니요.”
“그럼 벌써 교회 가려고?”
“아뇨.”
“그런데 왜 교복을 입고 있니?”
“그냥, 공부하려고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 다음 엄마 반응부터가 문제다.
“교복을 집에서 입으면 또 빨아야 하니까 그렇지. 아니 집에서 공부하는 데 왜 교복을 입고 난리야?”
그러면 아이가 말한다. 수위가 높아진다.
“엄마는? 누가 난리를 피웠다고 그래? 싫으면 그냥 벗으라고 하지, 난리라니?”
이쯤 되면 갈 데까지 다 간 거다. 그 다음 상황들은 뻔하다.

이성호 교수는 말한다. 이런 경우 엄마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어떤 아이는 교복을 입고 앉았을 때 차분한 마음에서 공부가 잘 되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공부하다가 교회 가겠다는 아이는 오히려 고마운 아이다. 또 어떤 아이들은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걸 부모들은 쉽게 판단해서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아빠처럼. 그래서 “교복을 입고 난리야?” 같은 말이 쉽게 튀어나오는 게다.

아이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게 어려운 건 말해 무엇할까. 모르겠다. 세상에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텐데….. 그러고 보면 나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거나, 알고도 잘못하는 부모들이 많은 얘기다. 그런 부모의 자식들은 슬프다. 옥상에 올라가면 한 번쯤 땅을 내려다보며 뛰어내릴 생각을 잠시라도 품게 된다. 그러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은 아이 가슴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내가 내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때 바로 그 아이에게 나는 말했다.
“넌 우리 집의 보물이야.”
“우리는 너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른단다.”
“그때 너를 낳았으니 망정이지, 안 낳았더라면 어쩔 뻔 했니?”
“너는 너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넌 니 방식이 옳다면 그렇게 해. 엄마 아빠가 응원해줄게.”

한그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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