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명호의 시네마레터 - 하향성의 삶을 씨름하던 그 시절의 벗에게


<수상한 고객들>, 류승범(배병우), 박철민(오부장), 성동일(박팀장) 주연 / 조진모 감독, 2011. 4. 14. 개봉
연봉 10억, 상위 1%를 향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써서 벽에 붙여놓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그의 정직함이, ‘내려놓음’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에 상향성의 욕망을 감춰둔 나의 이중성보단 훨씬 낫지 싶었다.

친구야, 20여 년 전 함께 자취하던 그 옥탑방을 기억할는지? 한여름엔 자동 태양열 난방이 되어 선풍기가 소용없던 그 조그만 한증탕. 한밤이 되어도 열기가 식지 않아 차라리 모기떼가 낫겠다며 옥상에 박스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곤 했지.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안착하려 애쓰던 그때, 우린 소명의식으로 세상을 변혁하자며 열에 들떠 토론하곤 했지.

너는 굴지의 보험회사로 당당히 입사했고 난 선교단체 인턴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 세월 우린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며 이 사회에 뿌리 내리려 애써왔다.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 변방을 떠돌지 않으려 땀 흘린 시간들…. 이상하지. 여전히 세상의 중심엔 한발작도 들어가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새 세상이 우리의 중심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얼마 전 <수상한 고객들>이라는 영화를 봤어. 잘나가는 보험 영업인이 고객의 자살 방조 혐의를 받고 내사까지 진행되자 생명보험 가입자 중 ‘수상한’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전을 벌이는 이야기. 영화에는 조금씩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우리 사회의 범상한 이웃들의 사연이 절절히 펼쳐지더라.

“고객님의 꿈이 저의 꿈입니다!”

고객 감동을 입에 달고 다니는 보험 영업인 배병우는 연봉 10억, 대한민국 상위 1%에 들겠다는 야망으로 살아가는 보험 판매왕이야. 전직 야구선수에서 보험 영업인이 되어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 날, 보험 고객의 자살을 도운 혐의로 조사 받은 뒤 회사의 내사까지 겹치면서 위기를 맞게 되지. 자살 시도 경험이 있는 고객들의 수상쩍은 생명보험 가입을 받아들인 덕에 보험 판매왕에까지 오른 그가 전전긍긍하다 2년 가까이 잊고 지낸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생명보험을 연금보험으로 전환하려고 눈물겨운 고객 서비스를 펼치지.

이 사회의 낭떠러지로 밀려가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안간힘을 쓰는 수상한 고객들의 모습은 안쓰럽고 가슴 아리다. 아내와 딸을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 오 부장은 보험회사 재직 중 사기를 당해 직장을 잃고 가족에겐 그 사실을 숨긴 채 대리운전을 하며 유학비를 대려 몸부림친다.

가수의 꿈을 지닌 소녀가장 소연은 부모의 빚을 떠안은 채 “몸이라도 팔아서 갚으라”는 겁박에 시달리며 남동생과 함께 살아가는데, 가수 공모 오디션에서는 자꾸 떨어지고, 노래하는 밤업소에서는 취객에게 곤욕을 당하며, 임시 거처는 철거당해 풍찬노숙으로 내몰린다. 죽은 매형을 대신해 병약한 누나와 어린 조카를 돌보는 영탁은 ‘틱장애’로 인해 취업은 꿈도 못 꾼 채 날품팔이로 살아가는데, 그나마도 일거리가 끊겨 노숙을 하며 폐지를 모으지만 누나마저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된다. 사고로 숨진 남편에 이어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복순은 남편 사별 후 우울증 약을 달고 살 정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며 4남매를 키우지만, “차라리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대드는 사춘기 큰딸로 인해 문득문득 생명보험 증서를 꺼내보곤 한다.

이들의 거처는 하나같이 도심에서 멀찍이 밀려난, 도심 진입이 영영 불가능해 보이는 변두리에 있지. 보험 영업인에게는 수상한 고객인 그들은 기실 우리 사회의 범상한 이웃들일 뿐이야. 그들의 수상쩍은 생명보험 가입을 연금으로 돌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피해를 면하려는 병우의 속 뻔한 ‘고객 서비스’는 가상하지만, 일은 그의 바람대로 되어주질 않는다.

“그냥 소박하게 행복하면 안 되니?”

애인이 말한 ‘소박한 행복론’이 ‘상위 1%의 행복론’ 신봉자 병우에겐 코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그를 난 쉽사리 속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더라. 연봉 10억, 상위 1%를 향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써서 벽에 붙여놓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그의 정직함이, ‘내려놓음’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에 상향성의 욕망을 감춰둔 나의 이중성보단 훨씬 낫지 싶었다.

소유 지향적 상향성의 욕망에 사로잡힌 채 앞만 보고 질주하던 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삶의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그의 눈에 수상한 고객 대신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 절망의 맨 밑바닥에 이른 사람들, 그들이 곁에서 이웃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지. 상위 1%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는 소박한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이 된다.

친구야, 나이를 먹어갈수록, 좀 더 안정된 자리를 추구할수록 세상이 내 안에 더 깊이 자리잡아가는 걸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지금 누구보다 안정되게 자리를 잡은 너는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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