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사람 : 아버지


감옥체험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고향을 생각하며 부르셨던 ‘반달’이란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내가 되었다. 한 인간에게 가족과 고향은 생각 이상으로 근원적인 무엇임을 그 때 깨달았다.

 


# 두 번의 감옥 체험

30대 초반, 내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두 번의 감옥체험이다!

배고픔과 자유를 위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중국 국경을 넘는 과정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된 것이다. 첫 번째는 2001년 12월 중국 연길에서 내몽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두 번째는 2003년 3월 광저우 내 미국 영사관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다. 각각 3개월, 17개월의 감옥체험을 했고 전자는 5만 위안의 벌금을, 후자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감옥생활은 자유의 소중함 만큼이나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두 번의 타향살이는 고향에 계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상실을 안겼다. 내가 이렇게 가족이 보고 싶은데 나의 가족은 오죽하랴. 특별히 그동안 기억에 희미해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다. 아버지는 이미 고향에 결혼한 가정이 있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을 올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를 만나 새 가정을 이루셨다. 어린 시절 나는, 모범생이며 우등생인 형과는 달랐다. 말썽꾸러기에다 공부도 못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등상을 탔다.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상을 타서라기보다 아버지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 감옥에서 만난 아버지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풍을 앓으신 이후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5학년 겨울부터 아버지가 거리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우연히 아버지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한동안 숨어서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는데,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과일을 사지 않고 지나쳤다. 아버지의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런 아버지가 창피하게 느껴져 무리들 속에 나 자신을 숨겼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마음에서 눈물이 흐른다.

1981년,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를 통해 처음 대면했던 ‘죽음’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가끔씩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되는 <반달>이라는 동요를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고향을 그리워할 때마다 구슬프게 그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감옥체험을 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나와 우리 가족의 인생을 꼬이게 하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해 왔다.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려야 했고, 어머니가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가정의 기형적인 역할 분담을 초래했고, 나의 성장기를 매우 힘든 시기로 만들었다. 특히 아버지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상주의에 빠져 있던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의 영향을 받아 현실 도피적인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경험해야 했던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돌아와야만 했던가? 그러나 감옥체험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고향을 생각하며 부르셨던 ‘반달’이란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내가 되었다. 한 인간에게 가족과 고향은 생각 이상으로 근원적인 무엇임을 그때 깨달았다.


#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노래

그제야 2001년 국경을 넘을 때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했던 재영 씨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가 한국에서 좋은 직장생활을 하고 새 가정을 이룬다 해도 가족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재영 씨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아버지가 전쟁으로 가족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50년이 지난 지금 불가피한 생존의 어려움으로 가족과 헤어져야만 하는 재영 씨의 모습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인한 가슴 아픈 역사의 되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탈북자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감정 이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 다른 형태의 확대된 나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두 번의 중국 감옥 체험은 아버지와 화해를 통해 그토록 갈망했던 나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분단이란 역사적인 현실과 아픔을 내면화하게 해 준 찬란하게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나에게 직접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삶과 죽음이란 거대하고 험난한 광야를 묵묵히 내게 보여 주셨던 것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글=오영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어느날>(1997), <후용리 공연예술단 노뜰>(2005)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금지된 여행>(2009)은 제7회 서울기독교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탈북 과정을 촬영하다 감옥에 갇힌 지난 2년여의 기록을 저서 <서쪽나라>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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