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사람’을 망각해버린 ‘나’에게


나는 유령이 된 괴물입니다. 나는 거짓 선지자이고, 거짓 교사입니다. 입만 열면 하늘의 언어들, 기도니 성령이니 회개니 복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온갖 언어들을 사용하여 말하지만 나의 말은 거짓말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언어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같고, 결국에는 찍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망각한 존재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올해 들어서만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대학생 네 명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평균 점수에서 떨어지면 그만큼 등록금을 차별하여 내도록 한 카이스트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슬픈 이야기는 곧 이 나라에 살아가는 우리들, 아니 나의 슬픔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경쟁으로 내몰아 차별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는, 인정머리 없는 나 말입니다.

나는 남들이 안 보는 데서 함부로 말합니다.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런 일로 목숨을 끊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인데, 그렇게 하니까 세계에서 100등 안에 들 수 있잖아….
그러고 보면 자살을 선택했던 네 청년이 결국 죽음으로써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은밀한 고민에 대해서 나는 좀처럼 공감하지 못합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나는 그들과 함께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아닌지 모릅니다.

결국 내가 하는 온갖 말 속에서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일등만 하며 여기까지 왔던 그들이 ‘평균 이하’의 존재로 추락하였을 때 느꼈을 모욕과 절망에 대한 연민은 찾아보려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욕은 자존감을 포기하라고 강요합니다. 인간이기에 자존감이 사라지면 무너집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호흡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목적 때문에 사람의 품위를 앗아가는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바라던 그런 세상은 아닙니다. 죄에 물들어 탐욕스런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므로 하나님을 배제하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없는 세상이 지옥임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지요. 인간의 품위를 앗아가며 누군가의 탐욕을 채워가려는 악한 세력 앞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지요.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연대이지요. 그들은 나약하나 그들의 주시오, 그들의 하나님이신 분은 충분히 강하여 악이 아무리 강력하나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들은 전쟁과 가난과 무지 속에서 최소한의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인생을 바치는 것이지요. 이태석 신부님처럼, 강원희 선교사님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들 곁에서 함께 웃고 함께 눈물 흘리던 예수님을 나는 똑똑히 보았지요. 그곳에 이뤄지던 하나님나라를 나는 보않지요.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사입니다.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사람들, 그들이 선택한 자살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그들에게 그렇게도 깊은 상처를 주는 이 악마 같은 세상을 향해, 또 이 험악한 세상을 부추기는 악의 세력에 맞서는 전사들입니다. 그 전사들을 키워낸 이 땅의 교회들이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이제 슬픈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들, 곧 이 땅을 존재하게 만드는 교회는 누구이며, 사람을 망각해버린 나는 또 누구일까요? 사람을 망각해버린 나는 생각하는 것이 유치하고 천박합니다. 사람이 겪는 수많은 마음을 읽지 못하는 둔감한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인지능력이 마비된 채 균형도 잃고 아름다움도 사라진 괴물입니다.
나는 역사에서 그런 괴물을 봅니다. 탐욕스런 권력과 재물을 탐하여 성도를 부추기고 그들에게 창과 칼을 들도록 하여 살육의 현장으로 내몬 저 역사 속의 괴물들. 전쟁광이 되어 인종을 살육하고 나의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가던 괴물들, 그런데 그들이 이 땅에서도 유령처럼 되살아나 교회당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령이 된 괴물입니다. 나는 거짓 선지자이고, 거짓 교사입니다. 입만 열면 하늘의 언어들, 기도니 성령이니 회개니 복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온갖 언어들을 사용하여 말하지만 나의 말은 거짓말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언어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같고, 결국에는 찍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망각한 존재입니다. 

나는 이 신성한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나는 압니다. 이런 악한 나의 결국이 파멸에 이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두려워해야 하는데 공포감마저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린 듯 파멸에 이르는 거짓을 멈추지 못합니다. 나는 결코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사람의 슬픔에 눈뜨게 할, 그래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나의 죽음과 나의 멸망 없이 나는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두려움은 오히려 이것입니다.

박명철 기자

 

 

둘   '진짜'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가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자, 사람들은 그를 ‘가짜’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진짜 메시아라고 주장한 많은 가짜들 중 한 명일뿐이라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절망에 빠져 있었다. 패배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자 마음이 뜨거워졌다. ‘진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몸통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 진실의 종아, 울려라!
늘어날 때로 늘어난 그의 메리야스가 눈에 띄었다. “아, 이 사람은 진짜구나!” 느낀 것도 그 메리야스 때문이었다. 목 늘어난 그것은 꾸며낼 수 없는 진짜였다. 기독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진짜네 가짜네 했던 이유는 그동안 한국 교회를 취재하면서 가짜를 너무 자주 만난 탓이다. ‘기부왕’이라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고, 여기저기 간증하고 다니더니 뒤로는 거짓말로 사기를 치고 다닌 이도 있었다.

신앙을 이용해 자기의 잇속을 차리는 가짜들 때문에, 진짜들 앞에서도 ‘진실의 종’을 들이대는 무례한 버릇이 생긴 것이다. 특히 영웅으로 급부상하는 사람을 만날수록, 더 큰 종을 준비해야 했다.
<소명3-히말라야의 슈바이처>를 보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는 ‘소명’ 시리즈. 기대감만큼이나 큰 종이 필요했다. 순수하지 못하게, 영화를 보는 내내 속으로는 “진실의 종아, 울려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목 늘어난 그의 메리야스를 본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진실의 종이 울린다. 그가 살아온 생애가 보였다. 진짜들은 자신의 겉모습이 어떻게 비치든 상관하지 않는다. 목 부분이 주욱 늘어난 메리야스를 입은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선교사 강원희 할아버지다.

 


# 몸도 치료, 마음도 치유
할아버지는 78세 의사다. 히말라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등 의사 없는 지역을 돌아다닌 게 벌써 30년을 바라본다. 이제는 여행 가방을 싸는 것도 힘에 부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간의 노하우 덕인지 가방의 무게를 규정대로 딱딱 맞춘다. 그가 다시 찾은 곳은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는 네팔이다. 그 높은 산맥을 감상하려는데 “네팔은 북한보다 3배는 더 가난합니다”라는 배우 신애라 씨의 해설이 판을 깬다. 이내 의료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그동안 크고 작은 병들을 묵혀왔던 이들이 모여든다.

한 눈에 봐도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어느 여인, 천식이다. 할아버지는 처방과 함께 “웃으세요. 화내지 말고 웃으세요” 한다. 여인은 웃지 못한다. 아이는 넷이고, 남편은 죽었다. 게다가 세 들어 사는 형편, 웃을 수 없다. 강 선교사 “그래도 웃으세요” 한다. 아픈 몸을 치료해주듯, 상처받은 마음도 치유해줬으면 좋으련만, 안타까워한다.

마냥 기다리고 서 있는 환자들 생각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저 입으로 들여 넣는다. 필름을 2배속으로 돌리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다. 다시 진료가 시작된다. 유독 손을 다친 여인들이 많다. 온갖 집안일은 물론, 생업에도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툭툭 갈라진 상처 이곳저곳에 조심조심 약을 발라주며, 그 나라 언어로 뭐라 뭐라 대화를 주고받는다. 무엇을 하다가 다쳤니, 다음부터 조심해라, 아파도 조금만 참아라 등등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주저주저 말을 뱅뱅 돌리던 한 여인은 할아버지의 친근한 모습에 마음이 열렸는지, 머리카락으로 감췄던 이마의 흉측한 혹을 보여준다. “이것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며 진짜 고민을 털어놓는다. 죽음까지도 결심했었다는 그녀를 위해 할아버지는 수술을 준비한다. 상처의 경중을 떠나,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또 진실의 종이 울렸다.


# 할아버지의 비유
할아버지가 ‘진짜’가 된 건, 진짜를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광주기독병원에서 만났던 카딩턴(H.A.Codington)선교사가 결정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월급을 어려운 사람 도우라며 반납하기도 했다. 해수욕장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의 장례 날에도 “내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갔으니 괜찮다”며 진료를 거르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도 진실의 종이 울리지 않았을까. 

자신의 병원을 열었고 끊임없는 환자 덕에 돈도 차고 넘쳤다. 그런데 한창 잘 나가던 의사가 병원을 그만두고, 오지로 떠나는 의료선교사가 된다니 부인 최화선 할머니는 계속해서 말렸단다. 완고하게 반대하던 할머니의 마음에 종을 울린 건 할아버지의 물고기 비유.
“내 인생의 머리와 꼬리 말고, 몸통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이말 한 마디에 30년 넘게 오지를 동행한 할머니도 진짜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면서, 이 선교사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는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목적지까지 오르는 힘이 여기에 있다.


# 진짜가 필요한 사람들
치료비도 없고, 보증인도 없는 가난한 환자를 쫓아낸 어느 대형병원의 행태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선교사가 세웠다지만, 가짜 병원이 된 탓이다. 어디 병원뿐일까. 가짜 교회, 가짜 회사들도 넘쳐 난다. 가짜 교회에 다니기 위해 가짜 교인이 되고, 가짜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가짜가 된다. 그래서 의사 강원희 할아버지 이야기는 ‘진짜’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된다. 부활이 필요한 이들에게, 진짜 예수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범진 기자

 

 

셋   봄을 잃은 이십 대의 벗들에게


이십대는 ‘봄’을 닮았다. 손 벨 것 같이 투명하게 쏟아지는 햇빛,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꽃들, 푸릇하게 돋아나는 나뭇잎을 보다 보면, ‘찬란하다’란 표현밖엔 쓸 말이 없다. 그러나 찬란하기에, 봄이기에, 어둠은 더욱 짙고 상처는 더욱 쓰라리게 느껴진다.


봄은 찬란하다, 차가움 어둠 상처가 섞여 있으니…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이, 45세란다.
벨기에 대학교수의 연구 결과이니 우리나라에서라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OECD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우리나라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나이군이 24세에서 26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말이다.
누구든 쉽게 말한다, 이십대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라고.
과연 이십대 당사자들도 그렇게 느낄까. 

이십대는 ‘봄’을 닮았다. 손 벨 것 같이 투명하게 쏟아지는 햇빛,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꽃들, 푸릇하게 돋아나는 나뭇잎을 보다 보면, ‘찬란하다’란 표현밖엔 쓸 말이 없다. 그러나 찬란하기에, 봄이기에, 어둠은 더욱 짙고 상처는 더욱 쓰라리게 느껴진다.
이십대 역시 그렇지 않은가 싶다.

나는 그랬다. 불안하고 우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유는 하나였다. 인생 선배 말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 될 것 같아 초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보석세공사나 병아리감별사 일이 내게 맞는 일이지 않을까. 다만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억울해졌다. 딱 한번뿐인 인생인데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훌륭한 보석세공사나 병아리 감별사가 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썩히고 있다니. 더구나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잘 하지도 않는 일을 건강까지 해쳐가며 ‘열심히’ 까지 하고 있다니.
난 결심했다. 이제 열심히 일하지 말자고, 다만 저절로 열심히 하게 되는 일을 찾아보자고.

물론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해서 자기계발서나 인생역전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확 바뀐 건 아니다. (매번 속았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인생 선배들 말에 흔들렸다. 그래서 적성에도 안 맞고 원치도 않은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인생과 감정을 낭비했다. 절망하고 실망했고 다시 결심했다. 이런 반복 끝에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던 일,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을 마침내 포기하게 됐다. 쓰라렸다. 패배자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비로소 불안이 사라졌다. 그토록 찾았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좋아한다고 믿었던 일이 아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말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이십대 이야기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다니, 그걸 삼십대가 돼서야 깨닫다니, 비웃는 이십대라면, 난 당신이 참 부럽다. 그리고 그런 당신이라면 봄을 봄답게 느끼는 방법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봄이 찬란한 이유는, 차가움과 어둠, 상처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당신은 알았을 것이다.

이 글 서두에 인생에서 가장 불행을 느끼는 나이가 45세라는 신문 기사를 인용했는데, 똑같은 내용을 한 다른 신문 기사는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마흔다섯, 이젠 행복할 날만 남은 나이.’
멋지지 않은가.
지금 가장 불행한 당신, 이젠 행복할 날만 남았다.

배지영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