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여행 가이드 윌슨

낮은 국격을 실감하며 뭔가 열등하고 의심 가는 나라 취급받는 것도 속상했고, 별로 매력적여 보이지 않는 나라에 비싼 비자 가격을 지불하며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도 빈정이 상했다. 그 이후에 윌슨은 행여 속상해했을 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나를 근처 야시장으로 안내했다.


 “제가 일본 사람 같나요?”
노란 얼굴의 아시아 사람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던 아프리카에서의 첫날. 스쳐가는 동양인들에게서 중국인,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이 나를 지나쳐갔다. 한번도 불리지 못했던 “코리안”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느끼기도 했고, 중국 무협 영화를 흉내 내며 빈정거리는 무리도 한둘이 아니었다. 흑인 특유의 투박함, 그리고 현존했다면 아낙 자손과 비견될만한 큰 덩치가 작은 내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조금은 주눅들어있고 약간은 두렵기도 했던 탄자니아에서 나는 트럭킹(트럭을 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독일인 두 명과 스위스 사람 한 명, 비영어권 국가였지만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반면, 낯선 환경에 덩그러니 놓인 나에게 유창하지도 않던 영어가 더 잘 들릴 리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뒹굴며 뛰어노는 동물만 기대하기엔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나 싼 물가만 예상하고 가벼운 지갑으로 왔다면, 바나나만 한 달을 먹었을 비싼 생필품 가격들에 혀를 내두르고 차라리 빨리 이동해 이곳을 벗어나야 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넘어갈듯 한 웃음소리의 윌슨

아프리카를 다니며 직접 찍은 사진들. 맨 왼쪽이 윌슨, 세 번째가 양정모 씨.
여행 프로그램 첫날, 처음 만나게 된 가이드 겸 요리사 윌슨은 탄자니아 사람이다. 까만 피부에 짧은 머리는 아프리카 어딜 가나 똑같았지만 또렷한 눈매와 특유의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가 특징인 윌슨은 마음이 따뜻했다. 아프리카 곳곳을 여행객들과 다니면서 적지 않은 수입도 벌어들이는 이런 여행 가이드는 요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불친절하거나 여행객들의 상태는 의중에도 없는 무사안일한 가이드들도 적지 않다지만 윌슨은 타국가의 여행객들과 깊게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내게 친절한 친구처럼 먼저 찾아왔다.

윌슨은 한 달여간의 여행 일정에서 모든 식사를 담당해야 하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근처 시장에서 장도 봐야 했다. 이때 나도 따라 일어나 트럭 뒤편 창고에서 아침 빵과 잼을 꺼내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유럽인들이 바쁜 일상 중 잠깐의 꿀맛 같은 휴가로 즐기러 오는 아프리카에서 그곳 현지인들의 문화나 가치관을 알려고 한다거나 알 필요를 못 느끼는 반면 어수룩한 말솜씨로 자꾸 말을 걸어오고, 현지 말을 수첩에 적어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는 내 모습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상한 마음을 위로해준 문어꼬치 하나

윌슨과의 우정이 더 깊어졌던 사건이 터졌다. 탄자니아 남부를 거쳐 말라위를 들어가려면 한국인은 탄자니아 수도 다레살렘에서 말라위 비자를 사야 한다. 함께 갔던 유럽인들이 온전히 하루를 해변에서 물장구치고 있을 무렵, 나는 툴툴거리는 다른 운전자 겸 가이드와 함께 일찍 그곳을 벗어났다. 탄자니아의 여행 도시 잔지바르라는 섬의 끝에서 한창 놀고 있던 나에게 “거기 들어가지 말고 비자 받고 있으라”며 “내가 얘기하지 않았냐!” 호통을 치는 바람에 서러워졌다.


불철주야 땀 흘리는 불굴의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많다지만 낮은 국격을 실감하며 뭔가 열등하고 의심 가는 나라 취급받는 것도 속상했고, 별로 매력적여 보이지 않는 나라에 비싼 비자 가격을 지불하며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도 빈정이 상했다. 그 이후에 윌슨은 행여 속상해했을 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나를 근처 야시장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그는 나에게 문어 꼬치 하나를 건네주었고, 근처 담벼락에서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갑 한 켠에 모셔둔 꼬깃꼬깃한 가족사진을 보이며 푼수 아빠가 되어버린 윌슨에게 지구 반 바퀴 떨어진 낯선 땅에서 오랜만의 따뜻함을 느꼈다. 언어와 생활습관, 심지어 한밤중 꿈마저도 전혀 다를 윌슨과 나는 그 이후 더욱 가까워져 말라위를 거쳐 짐바브웨, 잠비아까지 여행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낙 자손’들로부터 지켜주다

탄자니아를 벗어나면 자신도 여행자라며 길거리 상인들이 턱없이 부르는 비싼 가격에 제법 근거 있는 흥정으로 나의 편이 되어주었고 함께 다니기만 해도 왠지 현지인과 함께 동행하는 모습에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크고 작은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아낙 자손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다녔을 동일한 코스에도 뭐가 그리 신기한 게 많은지 여행객들보다 더 많이 물어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소년 같은 모습이 때론 귀엽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돌아가는 길에 5살배기 아들에게 건네주라고 장난감을 선물로 주었더니, 입이 귀에 걸려 당장 내일 고기반찬이라도 올릴 기세였다. 계산하지 않은 윌슨의 순수함이 참 좋았다. 이제는 사업상의 고객이 아니었다.


 먼 나라에서 온 친구로 내게 먼저 마음을 열어준 윌슨, 그리고 움츠리고 작아졌지만, 아프리카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된 나는 탄자니아에서부터 짐바브웨까지 약 한 달여간을 트럭에서 함께 지냈다. 현지 사람들과 부딪히고 거리에서 느껴지는 활기찬 움직임들이 귀찮은 듯 큰 귀로 파리나 쫓는 둔한 코끼리 한 마리 더 보는 것 보다 값진 경험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전해준 아프리카 소식은, 사자를 한 마리를 가까이서 보았다는 것보다 친구 윌슨과의 각별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요즘도 아프리카 소식을 접하거나, 그와 비슷한 용모의 흑인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에게서 배웠던 스와힐리어 인사법이 떠오른다.
“하바리?(어떻게 지내)” “무수리(잘 지내)” “아산떼 (고마워)” “까리부 나끼(천만에)”


글=양정모
8개월 동안 인도, 아프리카, 남미, 미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그곳 사람들과 어울린 이야기들을 개인 블로그(http://www.cyworld.com/regularmeeting)에 담았다. 지금은 성균관대 경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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