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함께 드리는 가정예배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이유
고전 5:19-22
찬송 270장(새찬송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친 바울은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여 줍니다. 그 전달 통로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은 너무도 예민하고 순결해서 우리의 악한 본성이 거절하면 그 순간 소멸됩니다. 그러나 그 소멸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양심은 둔하여 지고 탁하여 집니다. 그것을 성경은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합니다.

더불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합니다.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은 ‘고전’ 정도로 여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는 자는 말씀의 귀중함과 엄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검으로 성도를 무장시키십니다. 양심을 통하여 성령의 뜻을 알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과 싸우는 것, 이것이 성도의 바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생활은 그 성령과 말씀을 위하여 반드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합니다. 범사에 좋은 것이란 선한 것을 말하는 데, 선한 것은 하나님 생각,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이면 무조건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이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에 바울의 명령은 더욱 준엄하게 나타납니다.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당시의 작은 나무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어느새 수령이 500년의 고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학자들은 이 나무를 쓰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딱정벌레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굳건한 신앙이 그 나무라고 한다면 하찮은 딱정벌레는 바로 악의 모양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는 별 문제 없는 딱정벌레로 인해 수백 년의 고목나무가 쓰러진 것을 보면, 악을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바울의 깊은 호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크고 엄청난데서 오지 않습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무시해도 좋을듯한 데서 큰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무시할만한 작은 악에 대해서도 긴장하심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고후 12:9
찬송 432장(새찬송가)


바울은 자신의 교만함을 막으시려고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을 향한 은혜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육체의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를 선해 사용할 줄 아는 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승리를 이룬 주인공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딧세이>를 쓴 호머와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실명한 장님이었습니다. 한비자는 심한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논박해 올 것에 대비하여 쓴 반론서가 <한비자>입니다. 희랍의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심한 말더듬이였으나, 입에 자갈을 물고 피나는 발음 연습으로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돈키호테>의 작가인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는 한 쪽 팔을 잃은 상이 군인이었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른아홉 살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음에도 불구였습니다.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였고, 바그너는 피부 질환자, 반 고호는 환청에 시달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인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 9:3). 자신의 핸디캡을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도움말씀= 임성택 총장(그리스도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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