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재앙 이후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경고”이고, “하늘의 벌”이라고 정죄했다.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신앙인으로서 연민을 갖고 사랑을 베풀려는 마음을 먼저 갖기보다 야박하게도 정죄하고 상처를 파헤치는 데 앞선 꼴이었다.

그 사이 구조대원들은 원전의 폭발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일본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억누르고 재앙과 슬픔에 처한 사람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모은 시민들도 있었다. 교회 밖에서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보다 성숙하게 사랑의 손을 펴나간 것이다.

모름지기 교회는 이웃의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이 땅에 오셔서 그 재난을 거두어주시고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일깨워야 할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오히려 사람을 나누고 적이 되게 만들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생명의 존귀함과 상대에 대한 존중, 사랑과 평화의 언어를 앞세우는 노력의 중요성들이 오히려 교회로부터 멸살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생명의 축복이 가장 절실한 빈들은 폐허가 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가야 할 빈들은 도리어 저주의 탑에서 지탄을 토하고 위엄만 부리는 꼴이다. 이것이 어찌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신앙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웃의 아픔에 애절한 연민과 눈물,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마음이야말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본래의 자세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하나님을 기억할 때 고통의 자리에 같이 계시지 않는 존재로 오해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신을 누가 믿겠는가? 생명이 고갈된 빈들을 방치하는 신을 누가 갈망하겠는가? 재앙과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을 도리어 정죄하고 믿음을 추궁하는 신을 누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슬픔과 고통의 절규가 흐르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민주화운동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국가종교가 이슬람이란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배척한다. 종교가 다르면 이웃이 되지 못한다고 누가 선언했던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몰인정하고 메마른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는 마치 예수를 앞세우며 마음은 정작 자갈밭을 살아가는 꼴이다.

한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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