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에 다시 읽는 그들의 묵상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 곁을 떠나간 믿음의 큰 어른들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들의 책, 설교, 묵상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살피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비춰보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그들의 글을 읽고,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그 고난의 의미를, 참 쉬운 이야기로 설명해주고자 애썼다는 느낌이 전해집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너무나 쉽고 명확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자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반성하게 됩니다.


김준곤 목사님과 옥한흠 목사님은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최후의 만찬’이라고 알려진 그때 예수님은 떡을 찢으시며, 내 몸도 이렇게 찢겨질 거라 하셨고, 포도주를 따르시며, 내 피도 이렇게 콸콸 쏟아질 거라 하셨습니다.


01 십자가는 신앙의 본질_옥한흠 목사

알 것 같으면서도 (너무 신비해서) 점점 더 모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십자가의 신비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셔서 의인의 몸으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러분, 어떻게 이해가 쉽게 됩니까? 무슨 말로 그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있으며, 무슨 설명을 통해서 우리 가슴이 뜨거워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상상과 지각을 초월하기 때문에 마음에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설령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해도 그 깊이의 백만분의 일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장엄하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 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을 찬송하며, 그 분 때문에 정말 가슴이 메어지는 은혜를 받으며 그 분 때문에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깊이 잘 모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잘 깨닫지도 못할뿐더러 그 진리를 잘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병든 신앙생활이지요.
예수님은 세상 떠나시면서 다른 것을 기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성찬식을 통해 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배, 메시지, 기도…, 듣기에는 좋으나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바깥에 나가면 성도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했을 때 ‘부활의 도’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도’라고 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장차 일어날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데 화려한 천국의 무대 중심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등장합니다. ‘부활의 예수’가 아니지요.
천국 가서도, 나를 위해 몸을 버리신 십자가의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02 실질적인 성만찬_김준곤 목사

라우풀의 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라우폴 공이 예수님께서 성만찬에 쓰신 은잔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던 성을 떠날 때 말에 채찍을 가하여 막 성문을 나가려는 순간에 아주 남루한 거지가 라우풀 공에게 자선을 청했습니다. 그는 그 거지의 내미는 손을 재수없다고 생각하면서 돈 한 푼을 던져주고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 잔을 찾는 것인 줄로 생각하고 멀리멀리 그 은잔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건강도 쇠하여졌으며 그는 지쳐서 기진맥진했습니다. 백발이 성성하여 이제는 성화된 마음,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라우풀 공이 자기 성을 향하여 돌아올 때 그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동안 그에게는 깊은 죄의식과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가 성을 출발할 당시에 손을 벌렸던 그 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거지가 구걸하자 그는 “네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지만 내가 먹을 빵이라도 나누어 먹자”며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그 거지가 목이 말라 보여서 자기의 표주박을 가지고 손수 우물에 가서 물을 떠다가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거지가 홀연 예수님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찾는 은잔은 이 표주박이고 이 냉수는 나의 피며 네가 나눠준 이 빵조각이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질적인 성만찬은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받고 고난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푸는 데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른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시고”(마 25:35~40)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2~55).


03 휘장이 찢기다_강원용

예수님은 이제 죽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말구유에서 태어나 이사야 53장에 예언한 메시아 직분을 다 마치고 자기를 통해 이루려는 구원의 사업을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파괴하고 불행하게 하는 사탄의 본부가 정복되었다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는 이야기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누가복음은 전합니다.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그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 그중에서 로마 군인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란 패배가 아니요 궁극적 승리이며, 악의 힘이 승리한 표징이 아니라 ‘신앙의 눈’ 혹은 ‘마음의 눈’ 혹은 ‘진실의 눈’으로 보면 매우 역설적이게도, 악의 힘이 근본적으로 파괴당한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고통과 비참만을 볼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진리와 사랑의 승리를 읽어내야 합니다. 십자가사건은 모든 자연과 역사를 포함하는 전 우주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자연계에도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낮 12시가 되니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며, 주검의 무덤들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말처럼 어두워질 수 없는 태양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태양도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 참혹함을 차마 비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땅은 우리가 안심하고 거주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무엇이든 건설할 수 있는 인류 활동의 모체(母體)로서 그 땅이 갈라졌으니 안심하고 모든 걸 건설할 수 있는 바탕마저 흔들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더욱이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내렸다는 것은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예수님의 몸이 찢김으로써 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휘장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의 지성소로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속의 이분법’이 허물어지고 삶 전체가 지성소로 되었다는 것과, 성직자 중심 곧 사제 중심의 종교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에도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미 찢겨나간 휘장을 다시 수선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04 십자가 앞에서_한경직

여기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렘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예술 화가가 있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그때 여러 군인들이 못 박지 않았습니까? 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 가운데 자세히 보면 자기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것에서 이 렘브란트의 신앙이 얼마나 독실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에요. 옛날 사람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야. 오고 오는 죄인, 죄짓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의 죄가 모아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 가운데 하나를 자기를 그렸습니다. 자기 얼굴. 내 죄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이제 지난 19세기에 ‘스텐벅’이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예술가가 있는데 그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렸어요. 십자가의 못을 그린 그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이 구텐베르크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러한 후에, 한 세기 전, 한 세기 반 전쯤 된 후에 그때에 독일의 어떤 귀족의 아들이, 백작이 구텐베르크 박물관에 가서 이런 그림, 저런 그림 보다가 한 편 구석에 가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림이 있었어요. 그가 그 그림을 볼 때에 참 이상한 느낌이 마음속에 들어와 오래 그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서 피 흘려 죽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글이 있었어요.

이때에 이 젊은 백작 진젠돌프가 그 그림 아래 꿇어앉아서 새롭게 자기 과거의 모든 죄를 찾았어요. “내가 지금까지는 주님의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깨달았습니다. 내 남은 여생을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 십자가 그림 아래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그다음부터는 참 열심히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할수록 깊은 진리를 깨달아 ‘내가 어떻든지 주님의 이 사랑, 십자가의 사랑에 보답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 가운데서 자기 있는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다 구제하고 도와주고 자기는 힘들게 살고, 그래도 오히려 부족해서 ‘내가 안 되겠다. 내가 젊은 삶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복음 전파를 시작했습니다.

수난주간과 부활절을 당해서 사실 우리가 내 자신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진젠돌프처럼 내 자리를 살펴보는 때, 또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인생 문제도 깊이 생각하는 때가 바로 이런 때입니다.

편성희 기자, 이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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