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다의 지도자였다. 그는 어느 날 고국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예루살렘은 황폐하고 불에 탄 채 그대로 있으며 백성들은 고생을 면치 못한다고 했다. 암담한 현실이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울부짖기를 이 모든 것은 유다 백성의 죄임을 고백하고,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고 복을 내리시지 않겠는가” 한다. 그의 이러한 애절한 심사는 왕을 움직였고, 그는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가 일정 기간 예루살렘 복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는다.

그러나 현지의 사정은 매우 싸늘했다. 주변의 종족들이 느헤미야의 복구노력을 비웃었고, 훼방을 놓을 궁리만 하였다. 느헤미야가 장차 이룰 일이 만만치 않은 반대와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문은 바로 그러한 적대적인 환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유다민족 자신이 자신감을 상실하고 지쳐버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유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흙더미는 아직도 산더미 같은데, 짊어지고 나를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을 다 쌓지 못하리”(느헤미야 4장 10절).

밖으로는 침략자들이 진을 치고 호시탐탐 노리고, 안으로는 복구작업이 힘들어 백성들이 무기력에 빠지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그러나 외세의 음모에 대응하는 방비를 철저히 하여 이들의 음모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는 한편, 백성들의 신앙을 북돋는 노력을 다하였다. 느헤미야의 분투는 모멸과 빈축, 그리고 시기심의 와중에서 나온 노고였다.

산발랏은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철저하게 멸시한다. 느헤미야의 작업은 마치 불타버린 흙더미 속에 파묻힌 주춧돌을 다시 꺼내 쓰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빈정거린다. 예루살렘 복구의 무망함과 그 성과의 부질없음, 즉 ‘종국적인 실패’를 외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고생스러운 판국에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더욱 힘이 빠질 것이다. 도비야는 한 술 더 뜬다. 설혹 성을 쌓는 일에 성공해도, 그리고 돌로 견고하게 쌓는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여우 한 마리로 무너질 성벽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여우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견고하게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 영혼의 성채에 ‘여우 한 마리’로 상징되는 불신이나 미움, 또는 절망이나 탄식, 불안감이나 음모, 비방이나 오해가 스며들어 여기에 영혼의 귀를 뺏기게 되면 만사가 허물어지고 만다.


보라, 그토록 사랑하던 이들이 갈라지고 굳게 단결되었던 공동체가 깨어지며 합심했던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이 여우 한 마리 때문이다. 그 여우 한 마리를 제대로 물리치지 못해서 사람들은 별것 아닌 상처로 끙끙 앓고 병들며,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그 존재가 바스러지며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혀 생명력을 잃고 만다. 결국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어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교회생활이나 또는 이 시대의 민족사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나 우리는 무수한 수고와 땀을 흘려 용케 성벽을 쌓고도 단 한 마리의 여우 때문에 실패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의 방비를 제대로 하자. 독한 말들을 물리치고, 사랑과 믿음을 해치는 음모를 이기고, 영혼의 성채를 힘차게 세우는 기쁨이 있게 하자.

한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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