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 애프터>, 맷 데이먼(조지)/ 세실 드 프랑스(마리)/ 조지 맥라렌(마커스) 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011. 3. 24 개봉.

 

 쓰나미가 쓸어간 낙엽 같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타나톨로지(thanatology), 곧 죽음의 철학이 성숙한 사회가 삶의 철학이 깊은 사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야 무엇이든 죽음을 혐오하는 사회, 죽음에 대한 각성에 이르지 못한 사회일수록, 삶에 눈 뜨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터입니다.


일회용품을 날마다 소비하면서도, 삶이 일회성이라는 사실은 망각하고 사는 게 우리들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감내해야 한다”(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는 <리어 왕>의 경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웃 나라에 밀어닥친 대재앙이 결코 ‘남의 집 불 구경’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에게 외친 이 말은 비극의 고통에 직면한 인간 누구나 내뱉는 의문이자 절규일 터입니다.

최근 일본의 대참사를 보면서 죽음과 더불어 삶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인간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일컫지 말라. 삶의 저편으로 건너가 고통에서 풀려날 때까지는.”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코러스처럼, 삶 ‘저편’은 모든 고통에서 풀려나는 세계일까요?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이 삶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 있을까요? 재난의 일상화, 참사의 지구화라 할 만큼 세계는 갈수록 위험 지대가 되어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삶과 죽음이 나뉘지 않는 시공간을 살아갑니다.   

쓰나미가 영화 초반을 휩쓰는 <히어 애프터>(Here After)는, 마치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here) 죽음 너머(after death)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는 일상 가운데서 죽음을 마주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느린 속도로 보여 줍니다.
“죽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프랑스의 유명 앵커우먼 마리는 휴양지에서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 삶의 저편을 체험하고 살아납니다.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을 한 것이지요. 극적인 경험은 극적인 질문을 안겨 주고, 성공을 구가하던 삶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애써 외면하거나 밀어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을 뒤로 한 채 마리는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집필합니다. 제목은 <히어 애프터>.

샌프란시스코 부두의 노동자 조지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으되 평범하게 살아가려 애쓰는 인물입니다. 어릴 적 장시간의 뇌수술을 받은 후 죽은 영혼의 대화를 읽는(reading) 초자연적 능력을 갖게 되지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저주 받은 인생으로 여기며 은둔하려 합니다.
쌍둥이 형 제이슨을 의지하고 따랐던 열한 살 소년 마커스는, 자기 대신 엄마 약을 사러 간 형이 죽은 뒤 무엇에도, 누구에도 마음을 열지 않고 오직 죽은 형의 영혼과 만나려는 열망으로 살아갑니다. 평소 쓰지 않던 형의 야구모자를 쓰고, 잘 때는 형의 빈 침대를 향해 여전히 “잘자!” 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국적과 나이, 성별, 사는 곳이 다 다른 세 사람은 죽음 가까이서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각자 다르게 겪은 죽음의 경험은 그들에게 죽음을 삶의 일부로 되새겨(memento mori) 주었고, 그로써 죽음을 각성하게 해 주었습니다.
영화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에 눈 뜬 세 사람의 삶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아냅니다. 아울러 죽음에 눈 뜬 그들이 어떻게 삶에 눈 뜨는지, “죽음의 거울”에 비추인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인정하고 긍정하는지 보여 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타나톨로지(thanatology), 곧 죽음의 철학이 성숙한 사회가 삶의 철학(philosophy of life)이 깊은 사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지역 가톨릭 성지 내에 납골당을 세우려 했을 때,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인근 학교에 악영향 끼치는 혐오 시설”이란 반대 명분 이면에 “집값 떨어진다”는 숨은 본심을 간파하는 건 어렵잖은 일이지요. 이유야 무엇이든 죽음을 혐오하는 사회, 죽음에 대한 각성에 이르지 못한 사회일수록, 삶에 눈 뜨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터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 그대로, 지진해일에 참담하게 쓸려간 죽음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한계를 곱새길 일입니다. 톨레로 모리(tolero mori), 죽음을 감내하라는 말 그대로, 일회성의 삶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할 일입니다. 잘 사는(well being) 삶의 목적이 곧 잘 죽는(well dying) 데 있음을 알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더욱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옥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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