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아가 건강하면 죄책감도 건강하다. 지나치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브레너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렇게 해서라도 용납 받고 사랑 받고 싶은, 애정의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 다섯 살인 현경이는 엄마의 화장대에서 장난을 치고 놀다가 비싼 화장품들을 깨뜨렸다. 잘못인 걸 잘 아니까, 혼나기 전에 얼른 치우려다가 엄마에게 들켰다. 엄마의 추궁에 애꿎은 동생 탓을 했더니 엄마는 동생을 야단친다. 영문 모르는 동생은 울어댄다. 현경이는 동생이 우는 걸 보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결국은 자기도 따라 울면서 제 잘못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현경이는 배운다. 자기가 다룰 수 없는 물건들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사실과, 엄마한테 혼날 때 느끼는 불편감보다 동생에게 탓을 돌렸을 때 자신이 느끼는 불편감(이게 죄책감이다)이 더 크다는 사실을.


죄책감 경험하니 양심이 생기네

정신분석학자인 에릭슨(E. Erikson)은 죄책감이 나타나는 시기를 프로이트보다 조금 더 이른 만 3-5세 경으로 보았다. 만 3세 말의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활발한 움직임과 사고는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의 특징이다. 만일 이 시기를 지나는 아이가 자기의 행동이나 관심사에 대해 뭔가 이건 아니다,


즉 부적절하다고 느끼게 되면 자기가 주동이 되는 모든 활동에 대하여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아이들은 해도 되는 행동과 하면 안 되는 행동을 배우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도덕적 감각을 갖추면서 마음속에 양심을 갖게 된다.
또 다른 정신분석학자인 브레너(Brenner)는 프로이트의 죄책감 설명에서 다루어진 초자아를 조금 다르게 설명했다. 브레너는 초자아 안에 도덕성과 함께 ‘피학적 소망’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피학적 소망(masochistic wish)이란 고통을 감수하면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아가 건강하면 죄책감도 건강하다

세 살짜리 동생에게 자기 장난감을 빼앗긴 여섯 살짜리 아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에릭슨의 설명대로라면 이 아이는 어떤 행동을 해도 되는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동생에게 당장 내놓지 않으면 혼날 거라고 을러대는 행동은 해도 되는 것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놓거나, 실컷 때려주는 건 안 되는 행동이란 걸 잘 안다.


그러나 가끔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분노 때문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실천에 옮길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임을 몰라서 그리 행동한 건 아니다. 초자아가 이긴 경우에는 동생을 혼내주고 싶지만 자기가 직접 때려주지 않고 엄마에게 일러바치거나 아니면 꾹 참아 낸 뒤 그 사실을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말씀드린다.

브레너의 설명에 비추어 본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 그러니까 동생을 때려주거나 동생이 가져간 자기 장난감을 되찾아 오지 않더라도 고통을 참아내고, 이를 통해 착하고 어른스럽다는 부모님의 사랑을 얻고 싶은 마음이 초자아 속에 들어 있다. 이렇듯 초자아 형성은 일종의 현실 타협이며, 나를 용납하고 나를 사랑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포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초자아를 죄책감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초자아가 건강하면 죄책감도 건강하다. 지나치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브레너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렇게 해서라도 용납 받고 사랑 받고 싶은, 애정의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죄책감에 대한 정신의학적 접근을 다루면서 하나 더 다루어야 할 부분은 양육 부분이다. 인격 의학의 주창자인 폴 투르니에는 “때로는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좋은 뜻의 ‘가정교육’이 죄책감을 배양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말했다. 죄책감은 잘만 사용하면 얼마든지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조정하는 지렛대가 된다.

 

적절한 받침점만 찾아서 약간의 힘을 넣어주면 죄책감의 지레는 상대방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준다. 죄책감의 묵직한 불쾌함을 피하려고 강한 쪽이 약한 쪽에 자신의 죄책감을 떠넘기는 일도 흔하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겠지만 부모들은 강한 쪽에 서 있고 자녀들이 약한 쪽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죄책감은 자녀에게 전이된다

만일 자기가 갖고 있는 죄책감의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 부모라면 아이들을 기르는 과정 가운데 자신의 죄책감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지영 씨는 젊은 엄마다. 청소년 시기에 유난히 부모님께 반항을 많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귀던 남자친구와 덜컥 임신한 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에 무책임하고 생활력 없는 남편과 이혼을 결정했다.


딸을 남편에게 줄 수 없어서 자기 손으로 기르고 있지만, 지영 씨는 어떻게 아이를 길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부모님께 반항하던 자신의 모습이 딸에게 보일 때는 부모님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려고 딸아이를 더욱 단단히 조인다. 반대로 엄격하기만 한 부모님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를 때에는 자기가 부모님께 느꼈던 답답함을 아이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아 아이를 확 풀어준다. 결국 지영 씨의 딸은 종잡을 수 없는 혼란 가운데 자라게 되는 셈이다.

꼭 이렇게까지 병적인 경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부모가 바라는 모습으로 아이가 움직이기를 시도하는 경우는 흔하다. “네가 그런 일을 하다니 엄마는 정말 마음이 아프구나” 같은 가벼운 정도로부터,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는데 이런 행동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너 때문에 그냥 확 죽고 싶단 말야!”처럼 심한 정도까지 다양하다.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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