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의 어느 점심시간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학교에서 하는 연극의 공주 역으로 뽑혀 몇 주일 전부터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선 아주 쉽게 술술 외워지던 대사가 학교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마침내 공주 대신 해설자 역으로 바꿔 버리셨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점심시간, 어머니는 내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채시곤 대사 연습을 하자고 하시지 않고 정원에 나가 산책이나 하자 하셨다. 장미덩굴이 푸르름을 더해 가던 봄날, 거대한 느릅나무들 밑엔 민들레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어머니는 민들레꽃에 다가가더니 한 포기를 뽑으면서 말씀했다. “잡초들은 다 뽑아 버려야겠다. 이제부터 우리 정원엔 장미꽃만 길러야겠어.”

“그렇지만 난 민들레가 좋아요. 엄마, 꽃들은 다 아름다워요. 민들레꽃까지도.” 나는 항의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맞아. 꽃은 어떤 꽃이든 그 나름대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누구나 다 공주가 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 공주가 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단다.”

학예회 날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긴장되고 불안했다. 시작되기 얼마 전 선생님이 내게 오셨다. “너의 엄마가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게 민들레꽃 한 송이를 건네 주셨다. 민들레는 꽃잎 끝이 말리기 시작했고 줄기도 시들시들했다. 그러나 그 민들레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밖에 와 계시다는 생각을 하고 또 어머니와 점심시간에 나눴던 얘기를 생각하니 자부심이 되살아났다.


<민들레 이야기>라는 책에 나온 글입니다. 민들레처럼 살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두들 장미가 되길 바랍니다. 세상은 장미의 천국입니다. 민들레는 없어도 될 것이라 여깁니다. 장미가 주인공이어야 하며, 세상의 공주는 장미를 사랑해야 합니다. 장미로 사랑을 표현해야 하며, 장미의 가시조차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장미로만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여 장미의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는 장미로서 아름답듯이 민들레는 민들레로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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