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의 '아오모리 대작전'

인간은 압도적인 고통이 오면 사람들을 가르는 장벽조차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이 겪는 참상을 보며 전 세계 사람들은 함께 도울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누구보다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녀온 한국인들까지 따뜻한 손을 내밀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지진의 또 다른 면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지진이 나자마자 3월 12일과 14일 잇따라 한국긴급구조단 105명은 미야기 현 센다이 시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지고 진흙 속을 헤치며 생존자를 찾느라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방사능 피폭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던 17일과 18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타이완 등의 구조대들이 모두 짐을 싸고 떠났지만 유독 우리나라 구조대원들은 빠져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제공하는 편의도 사양하였습니다. 이재민 수송에 필요한 버스와 비용까지 모두 한국에서 가져갔지요.

 


차량에 드는 휘발유도 공수했고, 시체를 발견하면 대원들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일본의 관습에 따라 묵념을 올렸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는 주민들은 언제 배웠는지 또박또박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사히신문>은 한국긴급구조단원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어느 한국학생의 글은 네티즌들에게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4년 전 유학 와서 학교를 졸업하고 출국을 준비하던 그는 11일 평생에 잊지 못할 큰일을 겪고 말았습니다. 발 디딜 틈 없는 피난소에 대피한 그는 그곳에서 발전기를 돌리고, 사람들에게 모포를 나눠주며, 화장실에 물을 퍼 날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모르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었고, 한국인이란 걸 안 사람들은 한국행 항공편까지 알아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10년 만에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여기 일본이 영화처럼 침몰한다 해도 여기서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4년 동안 여기서 만난 지인들과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을 이대로 두고 나 몰라라 하고 한국으로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단한 존재도 아니며 큰 힘이 돼주지도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꼭 다 해내고 마음 편히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심지어 일본군대에 강제로 끌려가 평생을 고통 속에 내던져진 위안부 할머니들이 성금모금에 나섰습니다. 독도와 동해 지명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사비를 털어 해외 언론에 광고까지 냈던 가수 김장훈 씨도 거액의 기부금을 냈고, 한국의 기업들과 한류 스타들, 국민들이 매일 성금을 보내는 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르몽드>에도 소개되어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조용한 해빙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합니다.


마쓰모토 다케아키 일본 외상은 3월 19일 급기야 한국정부에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일본 국민은 한국을 어려울 때 도와주는 진정한 이웃이라고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치 터키와 그리스의 화해를 연상시킵니다. 1999년 터키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오랫동안 적대국이었던 그리스가 구호품과 구조대원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원조에 앞장섰고, 한 달 후 그리스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터키가 구조대원을 파견하였지요. 특히 터키가 파견한 구조대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구조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국은 친선 축구대회를 여는 등 국제사회에 ‘지진외교’라는 용어까지 나오게 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의 광경이 방송을 타던 날, 한 목회자는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환태평양 판의 지진대가 일본열도 오른쪽에 물려 있습니다. 그 위험한 땅에 사는 섬나라 일본인들은 대륙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단순히 땅을 넓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생존의 땅이 필요했으리라는 절박함이 보였습니다.”
대지진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또 하나의 희망을 만납니다. 이런 희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움이지 싶습니다.

박명철 기자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의 ‘아오모리 대작전’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마자 조현삼 목사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단원들은 짐을 꾸렸다. 세계 어디든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도착하여 따뜻한 이웃이 되었던 그들이다. 힘들게 현장으로 달려가 구제활동을 펼치고 구호품을 전달한 뒤 지난 3월 17일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오모리에 도착했다. 이 글은 아오모리에서의 짧고도 긴 하루를 쓴 글이다.

 

 

가깝고도 먼 이웃…이제 하나 되어 손잡다
 
2011년 3월 18일 새벽 1시 36분입니다. 오늘 사역을 마치고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3월 17일은 사역이 없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피해지역으로 부터 상당히 떨어진 아오모리에서 하루를 머문 까닭은 비행기 일정 때문입니다. 17일 목요일엔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18일 금요일에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하루의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오모리에 도착해서 호텔로 가는 길에 ‘열린 상점’을 발견했습니다. 상점이 열려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재해현장에서 며칠을 보낸 뒤라 열린 상점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어, 상점이 열렸네.” 예감대로 우리 팀은 아오모리에서 구호품을 구입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우리 팀은 한국에서 나올 때 5000만 원을 환전해서 들고 나왔습니다.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으로 그동안 보내준 긴급재난구호준비금이 2000만 원이 있었고, 여기에다 서울광염교회가 부활절 헌금에서 3000만 원을 미리 앞당겨 집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5000만 원으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사랑을 지진과 쓰나미로 재난을 당한 일본 국민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팀이 일본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남서울은혜교회에서 2000만 원을 보내왔고, 또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통장으로도 2700만 원 정도가 더 들어와서, 모두 4700만 원의 긴급구호 여력이 있음을 확인한 우리 팀은 ‘아오모리 구호품 구입 작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3월 17일 목요일, 우리의 휴식일은 예정에 없던 구호물품 구입 미션이 떨어진 것입니다. 구호품 구입팀장을 맡은 집사님이 “구호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마트 책임자를 만나 협상을 마쳤고 센다이로 내려갈 차량도 섭외했습니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저스코(jusco)로 향했습니다. 저스코는 대형할인마트입니다. 구호품을 구입해 센다이로 보낼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되었습니다. 저스코에서 미리 기다리던 우리 팀들의 안색이 어두웠습니다.


“가겠다고 한 트럭 회사에서 막상 차를 오라고 하자 어렵다고 하네요.”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센다이로 내려갈 트럭을 구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저스코에서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트럭을 구하러 무작정 흩어졌습니다. 이미 동경에서 구호품을 싣고 센다이로 올 트럭을 구해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압니다.

시간은 이미 오후 2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습니다. 미션만 있습니다. 아오모리에서 구호품을 싣고 센다이로 가는 탑차를 구하라. 아오모리 시청에 위기관리실을 찾아가서 우리가 온 목적을 이야기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시청 공무원이 영어를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영국 청년이 아오모리 시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어를 잘 했습니다.

“구호품을 사서 센다이에 보내려고 하는데 트럭을 구하지 못해 찾아왔습니다. 탑차 트럭을 구해 주세요.” 긴 이야기를 했지만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공무원은 한 시간 넘게 트럭을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백방으로 알아봐 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오모리 트럭운송조합에 전화를 해서 간절히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는 트럭조합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면서 기다려보자고 했습니다.

“구호품을 사서 센다이에 보내려고 하는데 트럭을 구하지 못해 찾아왔습니다. 탑차 트럭을 구해 주세요.” 긴 이야기를 했지만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공무원은 한 시간 넘게 트럭을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백방으로 알아봐 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오모리 트럭운송조합에 전화를 해서 간절히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는 트럭조합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면서 기다려보자고 했습니다.

 

“구호품을 사서 센다이에 보내려고 하는데 트럭을 구하지 못해 찾아왔습니다. 탑차 트럭을 구해 주세요.” 긴 이야기를 했지만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공무원은 한 시간 넘게 트럭을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백방으로 알아봐 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오모리 트럭운송조합에 전화를 해서 간절히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는 트럭조합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면서 기다려보자고 했습니다.

 


그 사이 그는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는 ‘긴급’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발부 받는 절차까지 알려주었고, 경찰서로 보낼 공문을 만들었습니다. 참고로 지금 일본의 모든 고속도로는 통행금지입니다. 오직 ‘긴급’이라고 쓰인 통행증이 있는 차량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우리 팀 차는 센다이에서 내려오는 중에 고속도로 통행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이 증서가 있다는 것은 기름을 가득 넣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속도로에 있는 주유소에서는 '긴급'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있는 차량에는 기름을 가득 넣어주고 있습니다. 오후 3시 30분경 이 공무원은 4톤 탑차가 20분 안에 저스코로 올 것이란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고, 경찰서에 제출할 긴급차량신청용 공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자신의 명함까지 붙여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팀을 도와주라고 단단히 일려 주셨나 봅니다.

마트 책임자에게 아오모리 시청 공무원이 긴급자동차 신청을 위해 써 준 공문을 보여 주었고, 이 공문은 마트에서 ‘마패’로 변했습니다. 구입을 해도 좋다는 최종 OK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저스코는 지진과 쓰나미로 7시까지만 단축영업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호품을 구입할 시간은 불과 3시간. 그 시간 동안 트럭 하나에 가득 실을 구호품을 구입해야 합니다.


우리 팀들은 각기 흩어져서 구호품을 구입했습니다.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이재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담았습니다. 진열대가 하나 둘 비어갔습니다.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구매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설명과 양해와 사정을 하면서 구호품 구매는 계속했습니다. 구매 종료 사인이 왔습니다. 더 이상을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꽤 많이 산다고 샀지만 트럭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우리 팀은 저스코와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대형마트인 이토요카도에서 추가 구입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부점장과 10여 명의 직원이 직접 나서서 도왔습니다. 시청에서 써준 공문이 여기서도 '마패' 역할을 했습니다. 구호품 구입을 다 마치고 짐을 싣고 나니 밤 9시였습니다. 경찰서에 들려 트럭의 고속도로통행증을 발급받고 숙소로 돌아오니 밤 11시, 늦은 밤에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배가 부르게 먹었습니다.

오늘 밤에 센다이로 내려가겠다는 트럭 기사님을 설득하여 우리 곁에서 조금이라도 자게 했습니다. 함께 내려갈 선교사님이 밤새 8시간을 혼자 운전해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기사님에게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이른 아침 센다이를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 일어나 배웅을 해야 할 텐데 지금 시간이 새벽 5시 20분. 아무래도 떠나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보내는 이 구호품은 미나미산리쿠 이재민들과 그 인근 이재민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날 보고 온 이재민 피난소 상황이 계속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미나미산리쿠에 한국교회 사랑을 보낼 수 있어서, 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 구호품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습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긍휼이 이 구호품에 담겨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밤, 구호품을 구입한 저스코와 이토요카도에서 구호품을 구입한 팀들이 오기까지 2시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문이 닫힌 상가에서 기다리는 동안 마트 직원들이 나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밖에 있는 우리를 안에 들어와 기다리도록 배려해 주었고, 트럭이 오자 모두 달려들어 짐을 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저들에게 전달되었나 봅니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을 연신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습관이지만 의례적인 인사 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올해 60세의 한 재일교포 아주머니는 퇴근도 않고 끝까지 같이 있어 주었습니다. 구호품을 차에 싣고 트럭 문을 닫기 전에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하나 되어 활짝 웃었습니다.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일본이 이 재난을 극복하고 어서 일어나라는 마음으로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탄 차가 떠날 때까지 배웅을 해 주며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글=조현삼 목사(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단장)
사진 제공=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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