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KTX의 단골 승객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한 주간에 두세 차례 통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막히기로 유명한 서부간선도로를 무사히 뚫고 광명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쌀쌀하여 플랫폼에 내려가지 않고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바로 옆의 할머니가 발을 동동 구른다. 서울 딸네 집에서 택시를 타고 역까지 오는 중 차에다 가방을 두고 내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방에 든 약이었다. 할머니는 옆의 손님에게, 자신이 환자라 여러 약을 갖고 다니며 수시로 먹어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소연을 하였다. 의사의 처방을 다시 받아야 약을 구할 수 있는데, 정말 딱한 노릇이었다.

할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하소연을 했다. 그렇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먼저 플랫폼을 향하려는데, 장내 방송이 귀에 들려왔다. 열차 시각을 말하던 아나운서가 “약 봉투가 가득 든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리신 할머니가 계시면…”이라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아직도 딸과 전화를 하고 계셨다. 나는 급히 계단을 올라가 통화 중인 할머니를 이끌고 ‘보관소’로 향했다.

무사히 가방을 찾아 든 ‘우리’는 급히 플랫폼으로 내려와 무사히 기차를 탔다. 할머니는 계속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의 자리도 같은 칸이었다. 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방금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면서 ‘고마운 아저씨’에 대해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다. 진짜 고마운 이는 내가 아니라 택시 기사이고 속히 방송해준 아나운서인데 말이다.

택시기사, 정말 좋은 사람이다. 손님이 두고 내린 가방, 그 안에 가득한 약봉투, 그 순간 그는 병든 자기 어머니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차를 돌려 역 분실물 센터로 달려왔을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 할머니가 과연 그 약 가방을 찾아갔을까?” 걱정할지 모른다. 아니면 지나는 길에 역에 들러 가방을 찾아갔는지 확인해봤을지도 모른다.

내리면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할머니, 이젠 가방을 놓고 내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진짜 고마운 사람은 제가 아니라 택시 기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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