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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인데…, 나는 왜 환자일까?
[103호] 2011년 03월 09일 (수) 문지현 @

우리 가족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 지내야만 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아프고 힘들어하면 내 기도가 부족한가, 내 관심이 부족한가 싶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수없이 많은 감정들 가운데 죄책감을 먼저 다루기로 한 까닭은 심리학과 신앙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자리인 동시에, 가장 다른 생각을 가진 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와 똑같은 “나는 죄인”이라는 느낌이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병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이런 느낌을 가져야 하는데 전혀 못 갖고 있는 게 병일 수도 있다.

정신과에서 죄책감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 잘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그런데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온 종업원이 잔을 내려놓다 말고 손님에게 확 끼얹었다.
“아니, 당신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이상하게 제가 자꾸 이런 행동을 하게 되네요. 정말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잔을 들어 끼얹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일이 벌어져 있네요.”
종업원은 너무나 미안해하면서 손님의 옷을 닦아 주었다. 손님은 화가 나긴 했지만 병이라고 생각하며 점잖게 충고를 해주었다.

“스스로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면 정신과 치료를 좀 받아보지 그러세요?”
“제 생각에도 그게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몇 달 뒤 그 손님이 다시 그 식당을 찾게 되었다. 음료를 주문하는데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 전에 만났던 그 종업원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어떻게, 정신과 치료는 받아 보셨나요?”
“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 치료 받았습니다.”
안심한 손님에게 종업원이 음료를 가지고 다가와 내려놓는 순간, 종업원은 다시 잔을 들어 손님에게 끼얹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아까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셨잖아요?”
“치료는 잘 받았죠. 이제 저는 더 이상 제가 한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든요.” 정신과 치료는 죄책감을 없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는 쓴 맛이 여운으로 남는 이야기이다.

죄책감이란 뭔가 잘못했다고 인식하는 행동에 대해 이차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러면 죄책감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까?
죄책감의 생성에 대한 심리 이론으로는 정신분석가 프로이트(S. Freud)의 이론이 가장 기본으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갈등(Oedipus complex)의 유산으로 초자아가 생겨난다고 설명했다. 오이디푸스 갈등이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인데, 전설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겪었다고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오이디푸스 갈등은 남자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내적 갈등을 의미한다. 이런 끔찍한 생각들을 순수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하다니, 하고 경악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정신과적 이론 설명이라 생각하고 들어보면 좋겠다. 어쨌든 이런 갈등은 아이들에게 즐겁지도, 편하지도 않기에 아이들은 내면 안에서 심한 갈등과 투쟁을 경험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는 자기보다 힘이 세 보이고, 어머니는 자기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기고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할 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결국 남자 아이가 이르게 되는 타협점은,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소망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닮아가기로(동일시, identification) 하는 결정이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아이가 느끼던 내면의 갈등(오이디푸스 갈등)이 서서히 가라앉고 부모가 갖고 있는 도덕적인 가치관들이 아이 자신의 것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를 초자아라고 부른다.

초자아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가운데 터득하고 배우게 되는 도덕성 및 이와 연관되는 가치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경험하는 부모의 양육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한다. 만 5-6세 정도가 되면 이와 같은 가치 기준의 내면화를 볼 수 있다.

세 살짜리 동생과 함께 다른 집에 놀러간 여섯 살짜리 아이는 동생이 그 집 물건을 다 만지면서 엉망으로 만들 때 “너, 이러면 엄마한테 혼나” 하면서 동생 뒤를 따라다니며 정리 정돈을 할 수 있다. 동생이 자기 물건을 빼앗아 가면 생각 같아서는 실컷 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엄마에게 더 신나게 혼날 걸 알기 때문에, 직접 동생을 때려주는 대신 부모님께 동생의 못된 행동을 일러바치는 쪽을 택한다.

초자아는 이와 같이 부모가 갖고 있는 이상(“동생한테 잘 해야 착한 아이지. 착한 아이는 사랑을 받고,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도 선물 받을 수 있어요. 우리는 네가 착한 아이가 되길 바란단다”)과 가치의 복잡한 체계(“동생을 혼내주려는 마음은 이해가 간단다. 물론 네가 동생이 한 짓이랑 똑같이 행동했으면 당연히 엄마한테 혼났겠지. 하지만 동생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혼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아”)에 기반을 두어 도덕적 양심을 만들어내고 유지한다. 5-6세만 되어도 아이는 자신의 부모가 자기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초자아는 한 사람의 내면 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서 그가 하는 행동이나 마음속에 품는 생각, 그가 받는 느낌들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검열한다.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이 기대한 바와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를 평가한다.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방을 청소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이 떨어지면 아이는 방을 청소한다.


그리고는 실제 행동에 대해서 이 정도면 깔끔하게 했는지, 눈에 띄는 부분만 대충 한 건지, 아니면 아예 청소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한심하게 게임만 하고 있었는지 초자아가 판단한다. 결국 초자아는 자신 안에 들어있는 작은 부모님, 혹은 작은 선생님과 같다.

죄책감을 설명하려다가 이야기가 길어져버렸지만, 죄책감은 결국 초자아에 의해 발생하는 셈이기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는 이 초자아가 지나치게 강력하면 사람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항상 100점을 맞아야만 하는데 97점을 맞으면 자신이 엉터리이고 바보 같으며 그때 괜히 5분 더 놀았다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도 귀엽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 지내야만 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아프고 힘들어하면 내 기도가 부족한가, 내 관심이 부족한가 싶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 휴일까지 반납하며 열심히 일했는데도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언젠가 불성실했던 나의 모습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 죄책감에 마음이 무너진다. 이렇듯 지나치게 비대해진 초자아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설정해 둔 채, 현재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편없고 초라한 모습에 채찍을 가한다.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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