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사람 ▶ 김정태 유엔거버넌스센터 홍보담당관

그 편지 한 통을 통해 나는 서른이 넘은 ‘국내파 토종’ 한국인도 충분히 유엔에서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익명의 사람에게도 이렇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는 학력도 경력도 볼품없는 빈민가 출신 주인공 자말이 등장한다. 그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출연해 어려운 문제들을 기적처럼 맞춰 나간다. 그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맞출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내왔던 세월이 운명처럼 퀴즈쇼의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퀴즈쇼에서 우승하기 위해, 지난 질곡의 삶을 버텨온 것만 같다. 기적적인 ‘우연’의 연속, 그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사는 참 우연의 연속이다. 살면서 내가 마주친 인연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 이야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가만히 돌아보면, 예전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고통이든, 모두 현재의 나를 있게 하려는 세밀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느낀다. 신앙인들에게 ‘우연’이 있을까? 유엔거버넌스센터 김정태 홍보담당관(<아름다운동행> 90호 참고)과의 만남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연처럼 다가왔던 필연이었다.

2007년 겨울, 몇 년 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었던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국제대학원에 입학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 ‘국제학’이라는 학문을 선택해 놓고 책을 뒤지며 밤낮으로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유엔(United Nations)에서 꼭 한 번 일을 해보아야겠다”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그저 목표일 뿐,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 카페에서 누군가의 유엔 인턴체험기를 읽게 되었다. 굳이 답장을 기대하지 않고 그에게 막막한 나의 상황과 조언을 구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서 구체적이고도 성실한 답장이 왔다. 유엔 본부의 인턴으로 진출한 본인의 사례와 함께, 친절한 격려의 메시지도 담겨 있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그 편지 한 통을 통해 나는 서른이 넘은 ‘국내파 토종’ 한국인도 충분히 유엔에서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익명의 사람에게도 이렇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1년 정도 지났을까? 나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유엔사무국 산하기관인 유엔거버넌스센터(UNPOG)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때 만난 면접관 김정태 홍보담당관이 알고 보니, 전에 이메일을 보내준 그 고마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연이 필연이 되어 그와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턴으로 합격한 후, 우리는 회사 근처에서 함께 점심을 하곤 했다. 그는 그때마다 그가 꿈꾸는 프로젝트와 비전을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비판적이었다면, 그는 이상적이었다.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시스템에 굴복하기보다는, 스스로 도전하며 능동적으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제3세계의 인권, 빈곤, 교육, 환경 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 둘 그것들을 실현해 나갔다.
그는 유엔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정리한 <최신 유엔 가이드북>,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스펙보다는 개인의 진정한 스토리를 만들라는 베스트셀러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아프리카 부룬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만든 동화책 <소풍대장 코끼리 윔보>, 소외된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한 적정기술 관련 서적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등을 번역, 집필, 기획했다.

무엇보다 크리스천으로서 가치 중심적인 일에 집중했고,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가치’를 듣고 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게 집필 제의를 해왔다. 국제대학원에 대해 가이드북을 쓸 의향이 있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대학원에서는 영문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기도 했었지만, 어린 나이에 책을 쓴다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다. 그러나 공익을 위한 콘텐츠를 유통하기 위해 사회적 출판사 ‘에딧더월드’를 창립한 그의 창의성과 지식을 나누자는 가치에 동감한 나는 도전을 결심했다. 당시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으며, 한국 최초의 국제대학원 가이드북 <한국에서 세계를 품다: 국제 대학원에 도전하라>를 집필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있고 나서 몇 년이 흐른 후, 나는 어느덧 국제기구 업무를 경험한 경력자가 되어 있었다.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 컨설턴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으며 멀리서나마 도전과 용기를 얻었다. 그의 소식은 내 두 번째 책인 <하루에 국경을 두 번 넘는 사람들>을 집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지금 그는 출판 기획 이외에도, 사회적기업을 통해 유엔이 정한 새천년개발목표(MDGs)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의 끊임없는 열정과 가치 중심적 행동이, 차가운 자본주의에 지친 많은 젊은이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내가 그와의 우연한, 아니 필연적 동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글=김주헌
국제활동 전문가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환경계획(UNEP)을 비롯해 유엔거버넌스센터(UNPOG), 유엔개발계획(UNDP) 등에서 일했으며, 저서로는 ‘하루에 국경을 두 번 넘는 사람들’과 ‘한국에서 세계를 품다: 국제대학원에 도전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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