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며 우리의 향락을 위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어리석은 착각 속에 살고 있으나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졌다면 그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 보내졌음이 분명하다. 한데 우리는 자신의 쾌락만 찾고 있다. 그렇다면 포도밭 주인의 의사에 복종치 않았던 농부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받으리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인의 의사는 이 계율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의 실행을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신의 나라가 건설되고 인간은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너희가 먼저 신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밖의 것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 이 것이 내 일생의 과업이다. 한 가지 일을 끝냈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과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작품의 마지막에 깨달은 내용이다. 생각의 깊이와 범위에 한계를 절감하면서 얼마 전부터 고전을 펼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적이지만 음울한 분위기가 부담이 되어 톨스토이를 들었다. 깊은 충격에 빠졌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독자를 이제 막 제경 작업을 마친 흠 없는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마음과 행동에 나의 마음과 행동이 있었다.


여주인공 마슬로바의 생각과 삶에도 나의 그것들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위선과 허위의 삶을 살아가는 고관대작들의 모습에도 내가 여지 없이 들어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을 콕 짚어서 나와 비슷하다거나 비교할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장한 모든 인물들의 모습에 내가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어느 시대에 살든, 어느 장소에 거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어가야 할 일들은 비슷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고전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젊은 시절 한 때 사랑했고 자신의 아기를 낳았던 여인을 재판하는 자리에 우연히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된 네흘류도프의 내적 갈등과 변화 그리고 부활의 과정은 내가 현재 맞닥뜨리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내 삶의 대응 방식을 깊이 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행동들의 근본적인 동기를 검토하게 만들었다. ‘타협하고, 모른척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혼자 자위하고, 보여지는 모습만 큰 문제 없으면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이 네흘류도프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은 것처럼 내게도 부활의 미세한 시작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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