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육체가 힘들수록 명료해지며 마음은 몸이 고단할수록 맑아지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등산인구는 심화되는 현대인의 생존 경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모든 생물은 경쟁을 한다. 경쟁에서 이긴 생물은 살아남고 지면 도태된다. 이름 하여 생존경쟁이다. 살아남아서 후손을 이어가려면 남보다 좋은 형질을 가져야 하고, 다른 개체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져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이겨서 살아남았다고 영원한 생존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생존경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늘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서 이전의 생존자를 이기고 번식을 반복함으로써 종족을 개선, 보존하며 혈통을 이어가게 된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생존경쟁은 그 의미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어 어감이 처절하고 슬프다. 그러나 이것이 종족을 보존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아프리카 가젤 영양은 표범을 따돌릴 수 있도록 빨리 뛰거나 요리조리 도약하여 뛸 수 있는 녀석들만 초원에서 생존할 수 있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해 빨리 뛸 수 없는 새끼나, 먹이에 눈이 팔려 경계를 게을리 한 녀석들은 표범과 같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자연은 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뛰는, 빨리 뛰어야 하는 환경에 적응한 녀석들만을 살아남게 함으로써 멸종하지 않고 자손을 이어갈 행복한 권리를 주며, 맹수에게 내장과 사지를 갈기갈기 뜯어 먹히는 동료를 곁에서 지켜보게 하는 슬픈 수업을 통하여 변화에 게으르지 않도록 훈계하고 있다.

도태되는 동료 영양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지만 슬프다고 하여 생존경쟁을 없앨 수는 없다. 생존경쟁이 없어진다면 빨리 뛸 필요도 없고, 변화할 필요도 없게 되므로 천국이 될 것 같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개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뿐 아니라 열성 개체도 번식하게 되어 먹이가 부족해 결국 조직 전체가 멸종할 수도 있다. 그래서 폐사율이 높은 생선을 운반할 때 수조 안에 생선의 천적 한 마리를 같이 넣는다고 한다. 그리하면 운반되는 도중 끊임없이 생존경쟁을 하게 되어 폐사율이 낮아질 뿐 아니라 생선의 육질이 좋아진다고 한다.

내가 죽는 것도 아픈 일이요 동료가 죽는 것을 보는 일도 슬픈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경쟁이 없는 조직을 갈망하고 본능적으로 동료들과 타협한다.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나를 죽이지 말라고 거래한다. 타협은 동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두 함께 푸른 초원에서 같이 살자고 하고, 같이 행복한 나라로 갈 수 있다고 의기투합한다. 하지만 이 담합이 자연의 섭리인 적자생존을 이길 수는 없다. 이긴 적도 없다. 담합이 이긴다면 개체수의 증가와 함께 열성 개체의 번식에 의하여 전체가 폐사되고 멸종되어 궁극적으로 섭리에 지게 되므로 사람도 자연의 원리에 예외 대상이 될 수 없다.

현대사회는 경쟁사회이며 역사는 싸움의 기록이고 생존경쟁 없는 곳은 없다.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지금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요 변화한다는 증거이고 내가 속한 집단에 생존경쟁이 있다면 건강하다는 신호다. 거꾸로 내가 경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요, 머지않아 표범이 달려들 수 있다는 표식이다. 내가 속한 조직에 생존경쟁이 없다면 피비린내가 안 난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폐사율이 높은 수조안과 다를 바 없다. 전체 조직이 건강하고 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천적을 한 마리 넣어 휘저어야 할 때가 이미 온지도 모른다.

예전에 살던 사회를 갇힌 사회라 한다면 지금은 점점 더 열린사회로 간다고 여겨진다. 열린사회는 감추어짐, 거짓이 없어지는 사회를 뜻하므로 따뜻하고 긍정적이지만, 열린사회의 의미 중에는 경쟁이 점점 심해진다는 뜻도 있으므로 차갑고 냉정하다. FTA는 장벽을 여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목검이 아닌 진검으로 하는 검투경기, 그것도 국내챔피언전이 아닌 전 세계의 고수들과 벌이는 시합이다. 국내 시합도 만만치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앞으로 국가 대항전도 해야 하는 처절한 운명에 놓여있다. 한 여름 달구어진 콘크리트 건물보다 더 뜨겁게 생존경쟁을 하는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삶의 질은 나아졌을지 모르나 지난날의 삶보다 분명 더 고단하다.

사람들은 이 고단함을 달래기 위하여, 아니 잊기 위하여 산으로 간다. 겉으로 보면 큰 돈 안 들이고 쉽게 운동할 수 있고, 체력을 단련하기 위하여 가는 것 같고, 살빼기 위하여 산에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단해진 마음을 쉬고,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생각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하여 간다. 나이가 들수록 산행의 횟수가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육체가 힘들수록 명료해지며 마음은 몸이 고단할수록 맑아지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등산인구는 심화되는 현대인의 생존 경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행히 조물주가 지어 놓은 산은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한다.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새 소리, 물 소리, 흙 냄새, 풀 냄새 등을 통하여 우리의 오관을 자극함으로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니 산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같이 마음을 쉴 수 있도록 조용히 다녀오자.


현란한 색조화장품 대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으로 화장하고, 온갖 소음 대신 새소리와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도회적이고 세련된 향수 대신 흙 냄새와 나무 냄새를 맡고 오자. 고단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려고 온 모두를 배려하고 존중하자. 제발 이제 ‘야호’는 그만 하고 자연을 듣고 숨 쉬다 오자.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고 화해의 결심을 발견하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최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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