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오늘을 살다

월간 <기독교사상> 3월호는 우리들, 곧 한국교회가 처한 막다른 골목에서 프란체스코를 화두로 뽑았다.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그를 거울로 삼아 우리를 들여다보고 헝클어진 오늘의 우리를 바로잡은 뒤 용기 있게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가자는 메시지가 거기 담겨 있다.
이 특집 글들이 지향하는 ‘프란체스코 살기’의 몇 가지를 뽑아보았다.


01. 삶이 말을 앞서다

 

프란체스코는 삶이 말을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설교나 주해, 신학적인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글이라곤 몇 편의 시, 기도, 편지, 그를 따른 형제들을 위한 공동체의 규칙과 교훈뿐이다. 이것은 물론 그가 교육을 그리 많이 받지 않은 것에 그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더욱 큰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 복음의 삶은 살아내야 할 것이지, 해석하고 설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가 그를 따르는 형제들에게 준 전도에 대한 조언이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준다. 이제 어떤 마을에 들어가 전도하려는 그의 형제들에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마을에 들어가서 설교하시오, 만일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시오.”
여기에서 프란체스코가 그의 형제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전도와 설교의 핵심은 말보다 복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기범 뉴욕장신대 교수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입버릇처럼 말로 설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가난과 청빈의 삶을 실천할 때, 한국교회는 그 회복의 물꼬를 트게 될 것이다.


02. 화해의 중재자로 우뚝 서다

당시 중세의 시대상은 몇 차례에 걸친 십자군원정으로 인해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간에 처절한 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잔인한 살육과 복수가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은 종교적인 권위를 통해서 거룩한 것으로 승인된 상태였다. 이러한 폭력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무저항의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한 프란체스코는 그의 오랜 꿈이었던 이슬람 전도에 나서게 된다.

순교를 각오한 채 이슬람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한 프란체스코는 비록 술탄을 전도하지는 못하였지만 술탄의 존경을 받고 안전하게 돌아오게 된다. 술탄 앞에 선 프란체스코! 이것은 화해의 상징으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폭력의 시대가 종교적인 허울들로 치장하고 피의 전쟁에 급급하고 있을 때 프란체스코는 시대의 정신에 대항하며 기독교와 이슬람 진영의 한 가운데 평화의 사도로, 화해의 중재자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한 사람들이다.
-소기범 뉴욕장신대 교수

▶프란체스코가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화해의 중재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남북의 긴장관계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의 알력은 물론, 종교 간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싹 트기를 기도하는 프란체스코의 영성이야말로 지금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가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길인 셈이다.

 


03. ‘가난’을 아내로 맞아 살다

 

가난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가난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기본이지요. 애덕의 일부이자 표현이니까요. 그러나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에요. 예수님은 가난하셨어요. 저 프란치스꼬는 가난한 이가 되고 싶었어요. … 진정한 가난은 저 밑바닥까지 들어가 정신을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중략) 하나님은 제가 나환자들을 만남으로써 그것을 알아듣게 하셨지요. 나환자들이 저에게 얼마나 끔찍하던지. 그건 어쩌면 나환자를 죄의 모습 자체로 여기던 교회의 해묵은 버릇 탓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은 강제로 격리되었고, 우리 부모들도 병이 옮을까봐 겁을 냈고, 저 자신 또한 나환자의 몰골을 차마 쳐다볼 수도 없었거니와 온 세상의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나환자를 만질 엄두는 못 냈지요. 그런 환자는 혹 만날 수도 있다는 상상마저 얼른 뿌리쳐 버리는 저였으니까요. 그런데 만났어요.

가던 골목이 어찌나 좁던지 서로 스치고 지나가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했는데…. 도망칠 생각이 불쑥 났는데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고상이 떠오르면서 앞을 막더군요. 꼼짝없이 골목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지요. 누더기를 걸친 나환자는 느릿느릿 앞으로 다가오고. 그는 헝겊으로 싸맨 손을 내밀면서 아픔이 서린 온유하고 겸손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그 순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이 떠올랐는데 바로 그와 똑같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지를 않겠어요, 무슨 일이 제게 일어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앞으로 껑충 뛰어나가 나환자를 껴안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춘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어요. 그러나 그건 제가 그에게서 받은 것에 비하면, 그가 입맞춤으로 제게 준 깨달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순간 제가 영원토록 아내로 맞으려던 그녀, ‘가난부인’의 빛나는 옷자락을 만졌던 겁니다. … 나환자에게서 알아본 ‘가난부인’은 이 세상 전체의 가난 그것이었고 모든 작고 힘없고 고생하는 것과의 연대였으며 하나님 자비의 가장 소중한 접점이었어요. … 가난이란 창조의 한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 신비를 만나게 하며 하나님을 찾아나서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내놓게 하는, 어쩌면 창조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이라는 것을…가난이란 사람들을 옭아매어 울리고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하는 혼란이 아니라 그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것을…그래서 가난 부인과 열정의 혼약을 맺었어요. 그때부터는 제 안에 어떤 두려움도 어지더군요. 아니 그것은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었어요.
-까를로 까렛도의 <프란치스코 저는>에서.

▶오늘이란 막다른 골목이 나타난 건, 가난과 결혼하여 살아라, 그리 말할 수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돈과 주님을 함께 섬기지 말라 가르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오히려 돈을 위해 주님까지 포기할 수도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 막다른 골목은, 어쩌면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선언, 곧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결단의 촉구인지 모른다. 

 


04. 창조세계와 가족 되어 살다

 

당신은 만물 속에 살아 꿈틀대는 신성을 보지요. 보통 사람이 지니지 못한 안목이고 안복이지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라도, 당신에겐 싱싱하게 살아있지 않은 게 없으니까요. 돌이나 바위 같은 무생물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의 뜀뛰는 심장을 느꼈으니까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것, 이것이 당신을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한 바탕인 거지요. 평화가 무엇이겠습니까. 만물과 고루고루 나누는 햇살처럼 따뜻한 형제애지요.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찬미와 영광
존귀와 복됨이 홀로 주님께 있나이다.
사람은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치 못하나이다.
내 주여, 모든 피조물로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복되신 태양 형제는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낮을 주고, 또 우리를 비추어주나이다.
또한 장엄한 빛 가운데서 아름답게 빛나면서
전능하신 주님을 증언하나이다.
주님, 그렇게도 밝고 절묘하고 아름답게 지으졌으니
자매인 달님과 별들로 인해 찬미받으소서.
주님, 그렇게도 밝고 절묘하고 아름답게 지으셨으니
자매인 달님과 별들로 인해 찬미받으소서.
주님, 구름 낀 날과 개인 날을 번갈아 선사하는
바람 형제와 대기를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주님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 조촐한
물 자매를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주님, 밤을 밝히는
불 형제를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그는 아름답고 태평하고 강건하고 맹렬하나이다.
주님 우리를 기르고 돌볼 뿐만 아니라
풍성한 과일과 화려한 꽃과 풀들을 낳아주는
우리 자매인 어머니 대지로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용서하고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는 이들을 인하여 찬미받으소서.
평화로이 참는 이들이 복되리니
지극히 높으신 주님, 그들은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이다.
주님, 우리 자매인 육체적 죽음을 인해 찬미받으소서.
누구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나이다.
죄 가운데 죽는 이들은 참으로 불쌍하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발견하는 이들은 복되리니
두 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할 수 없나이다.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릴지어다.
한껏 마음을 낮춰 주님을 섬길지어다.
아멘.
(여기 실린 노래는 김기석 목사의 번역으로 포이에마에서 펴낸 책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로렌스 커닝햄 지음)에서 인용했다.)
-고진하 목사

▶어떤 피조물도 보잘것없는 것은 없다. 어떤 피조물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 눈은 비로소 온전한 눈을 지닌다. 심지어 육체의 죽음까지 ‘누나’로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 깊은 깨달음 없이 우리는 결코 경박하고 천박하게 하나님을 안다, 말해선 안 된다.

정리=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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