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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엔 ‘한 걸음의 거리’가 필요하다
소설가 배지영 씨가 기억하는 ‘유년의 친구’
[101호] 2011년 02월 09일 (수) 배지영 @

친구의 취향이 곧 나의 취향이었다. 친구의 말은 다 옳았고 그녀만 따라했다. 난 친구가 있음으로 행복했다. 더 이상 오빠의 스토커로 언니의 찰거머리로 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행복은 3학년이 되면서 무너졌다.


어렸을 적 동네에 또래 친구가 없었다. 유치원도 그 흔한 학원도 다니지 않았으니 늘 심심했다. 그러다 보니 난 오빠의 ‘스토커’요 언니의 ‘찰거머리’였다. 오빠의 하교 시간에 맞춰 근처에서 기다렸다. 숙제하는 것조차 부러웠다. 언니가 친구들을 데려오면 속닥이는 소리를 들으려 문 앞에 몰래 앉아 있기도 했다. 나도 오빠와 언니처럼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숙제도 하고 싶었고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어쨌든 꿈은 자연스레 이뤄졌다. 1학년이 됐다. 숙제는 많았다. 글씨를 모른다고 우겼던 내 짝 공책 필기까지 대신 해주느라 벌써 손가락에 굳은살까지 생길 정도였다.
친구도 생겼다. 같이 화장실을 갔고(여자 아이들에겐 중요했다), 청소하면 기다려주었으며 집엔 꼭 같이 갔다. 수다 떠느라 서로의 집으로 데려다 주기를 반복했다. 누가 뭐래도 단짝 친구였다.

난 친구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글씨를 예쁘게 쓸 줄 알았고 노래도 잘 불렀다. (나와 같은) 막내임에도 나와 달리 할 줄 아는 것도 많았다. (고작 1학년인데) 감자나 계란을 삶을 줄 알았고 밥까지 지을 줄 알았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들을 찾아내 불량식품을 살 줄 아는 배포도 지녔다. 숙제를 마치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동시를 지으며 노는 고상한 취미도 있었으며 ‘독도는 우리 땅’ 같은 어려운 가사가 들어있는 가요를 척척 불러 제끼는 높은 식견(!)도 지녔다.

친구의 취향이 곧 나의 취향이었다. 친구의 말은 다 옳았고 그녀만 따라했다. 난 친구가 있음으로 행복했다. 더 이상 오빠의 스토커로 언니의 찰거머리로 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행복은 3학년이 되면서 무너졌다. 3학년에도 여전히 같은 반이 됐던 난 무척 행복했다. 계속 단짝 친구로 지내면 될 터였다.

봄 소풍을 가는데 선생님은 ‘조’를 짜라고 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말이다. 고민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러나 친구는 달랐던 모양이다.
친구는 당시 반장이었던 아이와 조를 만들겠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더구나 친구는 너무도 진지하게 그 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난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고 싶어.”

처음 알았다. 내가 공부를 못했다는 걸 말이다.
그때까지 난 한 번도 스스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내게 공부를 못한다고 한 적 없으니.) 숙제도 수업 시간도 즐거웠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따로 시험공부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모르는 문제를 틀리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지 않나.)
공부 잘 하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친구 덕에 그해 봄 소풍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소풍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맛있던) 김밥도 과자도 모두 맛을 잃었고 의미를 잃었다, 반장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 모습을 보지 않으려 애쓰느라.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던 우리의 우정이 이렇게 쉽게 깨지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짝 친구 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혼자 화장실을 가고 집에 갔다. 그러다 (단짝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친한 친구도 생겼다. 물론 집에 가서는 다시 혼자가 됐다. 혼자 숙제를 하고 동시를 짓고 그림도 그렸다.

그러다 취향이란 것이 생겼다. 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만화책이나 잡지책 읽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알았고 동시 짓는 것보다는 가요 부르는 걸 더 즐거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친구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이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맞춰왔던 것이다. 친구의 취향이 내 취향일 수 없다는 것을, 친구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 친구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쨌든 난 친구 없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 뒤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단짝 친구와 난 다시 화해(?)를 했다. 물론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녀와 난 조금 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그 ‘거리’가 있음으로 마침내 성숙한 관계가 됐던 것 같다. 어쩐지 난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더 이상 친구를 따라하는 짓을 멈췄다. 친구 역시 (아마도) 내게서 숨통이 틔었을 것이다.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꿈에도 그리던) 단짝 친구가 되어 줬다는 것도 고맙고 잠시 멀어짐으로써 조금 더 성숙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 기대지 않는, 한 개인으로 누려야 할 자유나 기쁨을 일찌감치 깨닫게 해준 것도 큰 고마움이다. ‘나만의’ 취향, ‘나만의’ 생각이 없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와도 온전한 관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한 걸음 쯤의 ‘사이’가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숨통이 되고 온전한 개인과 개인이 바로 서서 만날 수 있는 건강한 ‘틈’으로서의 ‘사이’ 말이다.   


배지영

배지영 님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오란씨>(민음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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