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명호의 시네마레터▶ ‘관계’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라이언’에게


기업의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은 라이언은 자신의 유명한 ‘빈 배낭’ 강연을 하던 도중, 갑자기 강연장을 뛰쳐 나갑니다. 언제든 빈 배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던 그에게, 빈 배낭을 채우고 인생을 여행할 소중한 무언가가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고향이 어딥니까?”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수석 기장이 사상 일곱 번째로 1000만 마일리지를 돌파한 해고 (통보) 전문가 라이언 빙햄에게 기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묻습니다.
“여기 하늘요!(Up in the air)”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 라이언의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합니다. 그의 직업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기업의 구조조정(감원과 해고)시 회사를 대신해 최대한 차분하게 해고 통보를 전하고 소란없이 해고자가 받아들이게 하는 일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대량 감원과 해고가 예상되는 경제 불황기가 그에겐 최대 호황기가 될 터입니다.
1년 중 320일이 넘는 날을 집밖 ‘창공’에서 보내며 출장 업무를 수행하는 그에게 인생이란 ‘빈 배낭(empty backpack)’이 최선인 힘겨운 여행일 뿐입니다. 어떤 소유물도,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조차 짐이 되는 여행 말이지요. 그러니 언제든 빈 배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겐 인생의 지혜인 셈입니다.


‘관계’는 인생에서 포기해야 할 짐?

“아이가 아픈데 보험료는 어쩌란 말입니까?”
“주택 구입 이자는 어떡하라구요?”
“가족들에게는 뭐라 말해야 하는 건가요?
“내가 이 회사를 위해 일한 게 몇 년인데 이렇게 간단히 나를 해고해?”
울먹이거나 항의하거나 소리치는 해고 대상자들 앞에서, 라이언은 어떤 연민이나 친절도 배제한 채 최대한 ‘품위 있게’ 해고를 통보합니다.

심리학을 전공한 신출내기 사원 나탈리가 ‘온라인 화상 해고 통보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제안을 하고 회사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자, 그는 단호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해고 통보를 그런 식으로 디지털화하는 건, 그가 보기엔 ‘품위 없는’ 짓이었으니까요.

‘빈 배낭 인생관’을 가진 라이언은 어느 누구와도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직장상사나 부하직원, 아니면 품위 있게 내보내야 하는 해고 대상자들이 사회 관계의 전부입니다. 아니, 더 있기는 하군요. 1000만 마일리지 적립에 필요한 항공사 직원과 렌트카 직원, 그리고 호텔 직원 들. 이들은 필요상, 업무상 만나고 연결되는 네트워크일 뿐 진지하고 진실한 소통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꽤 잘나가는 연사이기도 한 그는 늘 빈 배낭을 앞에 놓고 강연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새 배낭이 생겼습니다. 이제 그 배낭에 그냥 아는 사람들부터 친구의 친구, 사무실 동료들, 그리고 사적인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친구, 가족, 애인-을 채워넣으세요. 이제 그 무게를 느껴보세요. 당신의 관계는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요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배낭을 내려놓지 않습니까?”

그래서일까요.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친구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고민을 나누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저 술 한 잔 하며 시시껄렁한 수다라도 떠는 친구 한 명 정도는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런 ‘친구’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그가 천애고아는 아니어서 가족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누나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귀찮고, 곧 여동생이 결혼한단 소식에도 결혼식 참석은 애당초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니 가족인들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외롭게, 홀로 죽는다는 생각을 지닌 그에게 햇병아리 직원이 “개똥 철학(bullshit philosophy) 고만 지껄이라”고 쏘아부쳐도 그 생각 바꿀 마음은 애시당초 없는 눈치입니다.

그런 그가 출장 여행길에서 자기처럼 항공 마일리지 적립에 집착하는 여성 알렉스를 만나면서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집보다 호텔이, 가족이 요리한 따뜻한 음식보다 싸구려 기내식이, 회사 책상보다 기내 좌석이 더 안락한 라이언은 비로소 알렉스에게 마음의 자리를 조금씩 내주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라이언의 여동생 결혼식에까지 함께 참석한 뒤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마음의 ‘조종석’을 알렉스에게 내주기에 이릅니다.


인생의 배낭, 무엇을 채우시렵니까?”

기업의 컨퍼런스에 연사로 초청받은 라이언은 자신의 유명한 ‘빈 배낭’ 강연을 하던 도중, 갑자기 강연장을 뛰쳐 나갑니다. 언제든 빈 배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던 그에게, 빈 배낭을 채우고 인생을 여행할 소중한 무언가가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빈 배낭 강연’은 무의미해졌던 게지요.

강연장을 뛰쳐나간 그가 달려간 곳은 시카고에 있는 알렉스의 집이었습니다. 벨을 누르고 부푼 기대로 서 있는 라이언 앞에 문이 열리자, 거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란과 누가 왔는지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당혹감에 휩싸인 알렉스와 혼란스런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라이언.
나중 알렉스는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어 뭘 원하느냐고, 서로 다 알고 만난 거 아니었냐면서 “당신은 현실의 도피처”이자 “잠시 동안의 짬으로 만나는” 대상일 뿐이라고 말할 때, 눈발이 휘날리는 창밖에서 들여다 보이는 홀로 불 켜진 라이언의 방은 오래 적막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나탈리의 야심작 ‘화상 해고 통보 시스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해고 통보만큼은 ‘인간적’으로 ‘품위 있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경영진은 그 계획을 전면취소합니다. 물론 라이언은 전처럼 다시 해고 통보 출장길에 나서게 되었지요.
공항 탑승구 앞에서 항공기 타임스케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문득, 목적지를 잃은 것처럼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라이언은 자신의 ‘개똥 철학’대로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빈 배낭’을 메고 홀로 품위 있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게 사람을 끊어내는 게 주업무인 해고 전문가에게 어울리는 삶일지 모릅니다. 대지에 마음 한 자락 풀어놓지 못한 채 언제나 ‘빈 배낭 인생관’으로 창공을 고향으로 여기는 자의 라이프스타일일지도 모릅니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오직 여행가방과 함께.

라이언과 달리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haticus?공감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 공감의 대상, 소통의 관계일 겁니다. 그가 강연 때 늘상 하던 물음을 이제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당신에게 새 배낭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채우시렵니까?”

* <인디에어>(Up in the Air), 조지 클루니(라이언)/베라 파미가(알렉스) 주연,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2009년.

옥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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