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전쟁에서 승리란 없다.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전쟁의 명분은 달라도 목적은 언제나 같다. 그것은 (…) 사회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인용한 조지 오웰의 글을 보며, 다시 한 번 비상시일수록 감정적 흥분보다는 비상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생전에 전쟁은 또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소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서로 협상을 하고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교류를 하면서 오고갈 수 있는 상황이 먼저 되어야 할거에요. 그런데 양쪽 정권에서 원하는 통일은 내가 너한테 질소냐는 힘겨루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되는 통일을 보느니 나는 그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전쟁을 또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기죠.”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출간을 기념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박완서님이 하신 얘기입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그 산이 거기 있었을까>는 개성 출신의 노작가가 몸소 겪은 한국전쟁이 소설의 주요 배경을 이룹니다. 문학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최근 북한의 연평도 공격이 있고 나서 강경한 응징론을 넘어 북진통일론까지 기세등등하게 울려나오는 마당에, 전쟁을 몸소 겪은 우리 시대 대표적 문인의 인터뷰가 예언적으로 다가온 때문입니다.


전쟁 ‘당사자’의 부조리한 동거, 그리고 그들의 최후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와 <화씨 9/11>(Fahrenheit 9/11)입니다.
<노 맨스 랜드>는 보스니아-세르비아 내전을 다루는 전쟁 영화이되 전투 장면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92년 보스니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유고연방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내전을 일으킵니다. 추악한 “인종 청소”로 불리는 이 3년간의 전쟁으로 20만 명이 넘는 보스니아인이 희생되고 230만 명의 전쟁 난민(難民)이 생겼습니다.

영화는 보스니아 민병대원 치키와 세르비아군의 신병 니노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둘은 예기치 않게 전장 한복판의 참호 속에 함께 갇히는 바람에 졸지에 ‘적과의 동거’를 하게 됩니다. 게다가 치키의 동료인 체라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 위에서 손가락도 꿈쩍 못하고 드러누워 있습니다. 이 참호 속에서 서로를 죽이지 못하는 건 지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쪽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 생존자를 죽이기 위한 적군의 가차 없는 포격이 집중될 게 빤하기에 둘은 위태로운 공존을 선택합니다.

둘은 서로 어느 쪽이 전쟁을 먼저 시작했는지를 놓고 치고받다가도 서로 잘 아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한결 적의를 누그러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신과 적개심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으르렁대고 상처를 입힙니다. 이 참호 속 상황은 유엔군이 중재에 나서면서 언론에도 알려지지만, 유엔은 적극적인 사태 해결보다는 철저히 3자적 방관자로 거리를 두려 할 뿐입니다. 유엔군 장교의 말마따나 그들에게 “급한 일은 철수하는 것뿐”이지요. 언론은 언론대로 전쟁 중의 적끼리 운명공동체가 된 이 부조리한 상황을 철저히 매력적인 ‘영상 상품’으로 다루려 할 뿐입니다.

결국 니노와 치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유엔군에 구출되어 생환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적개심과 불신이 그들을 파국으로 몰아갑니다. 체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뢰제거 전문가의 “제거 불가” 판단 이후 그는 홀로 참호 속에 남겨집니다. 유엔군도, 기자들도, 모두 제 갈 길로 떠나버립니다. 그곳은 사람이 없는 ‘무인지대’일 뿐이지요.

<노 맨스 랜드>는 전쟁 당사국을 상징하는 두 인물과 버려진 자의 예상 가능한 최후를 담담히 보여주면서, 제3자인 유엔군과 기자단의 냉정한 거리를 확인해 줍니다. 적의와 불신 속에 죽어가는 건 결국 당사자들이며, 주변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태를 방관하거나 이용한 뒤 제 갈 길로 갈 따름이지요. 그게 전쟁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합니다.


“당신 아들을 참전시키라”에 응할 지도층이 있나

<화씨 9/11>(Fahrenheit 9/11)
9?11 사태로 촉발된 미국 내의 호전적 분위기와 공포심을 다룬 영화 <화씨 9/11>은 조지 부시 정부가 기획한 이라크 전쟁의 이면을 노골적으로 까발립니다. 영화는 이라크 전쟁뿐 아니라 국가비상사태를 이용한 ‘공포심 조장과 확산’의 정치 술수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2004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논외로 하더라도, 감독 자신의 신념과 문제의식을 극사실 형식으로 치열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노력은 가히 놀랍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허구를 조롱하며 전쟁을 돈벌이로 활용하는 군산복합체의 탐욕도 폭로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를 상대로 초강대국 미국의 화력을 쏟아 부은, 그나마도 남의 나라 땅에서 싸운 이 전쟁에서 수천 명의 젊은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1년 여 만에 부상자만 5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와 “세계 평화”라는 정치적 레토릭을 벗겨낸 이 전쟁은 정녕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누구의 전쟁이었을까요? 특히 535명이나 되는 미국 국회의원 가운데 아들이 이라크 전에 참전한 경우는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뒤, 감독 자신이 국회의원들에게 “그렇게 옳은 전쟁이면 당신 아들을 참전시키라” 권하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참에 평양까지 진격하자”고 나서면 남의 땅도 아닌 우리 땅에서 일어날 피해를 어느 정도 크기로 가늠할 수 있을까요? 1994년 1차 북한 핵 위기 당시 클린턴 정부가 실시한 북미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는 24시간 안에 군인 20만 명을 포함해 수도권 중심으로 약 150만 명의 사상이 예상되며, 개전 일주일 이내 남북한 군인과 미군을 포함한 100만 명 사망에 남한 측 민간인 사상자도 500만 명이 나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2004년 합동참모본부에서 실시한 ‘남북군사력 평가 연구’에서는 전쟁 발발 24시간 이내에 수도권 시민, 국군, 주한미군을 포함해서 230만 명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다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전쟁에서 승리란 없다. 전쟁은 끊없이 이어질 뿐이다. 전쟁의 명분은 달라도 목적은 언제나 같다. 그것은 (…) 사회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인용한 조지 오웰의 글을 보며, 다시 한 번 비상시일수록 감정적 흥분보다는 비상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도자든 일개 시민이든 말이지요.


*<노 맨스 랜드>(브랑코 쥬리치, 필립 쇼바고비치 주연/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 2004년작) | <화씨 9/11>(마이클 무어 감독, 2004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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