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인 신앙   
성경 요한복음 12:3
찬송 211장(통 346장)

 

예수를 만나 최고의 칭찬을 받은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에 가셨을 때 예수의 일행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문둥이였던 시몬이었습니다. 그 집은 얼마 전에 무덤에서 일어난 나사로의 집 부근이었고 아마도 나사로의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이 잔치는 예수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풀어 예수의 발을 닦아 향유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꾸짖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유다의 말이 맞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어 없애는 것은 낭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를 책망한 뒤 그 여인이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며 위대한 행위로 칭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그 많은 돈이 들어가는 향유를 왜 예수께 드렸을까요? 그녀는 그것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계산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에 얼마 정도를 드리는가 하는 계산을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렸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한 주님께 헌신을 하려면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계산 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중동에서는 여인들이 머리털을 매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는 일은 없습니다. 여성은 결혼한 날부터 머리털을 매어 올립니다.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서는 일이 없습니다. 머리를 동여매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관례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인 향유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풀어 씻겼으니 얼마나 대담한 행동입니까?

마리아가 이렇게 주위의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를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모든 행동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크기에 사람들이 비웃든 말든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다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헌신하고 그 헌신의 향기가 우리 가정과 직장과 이 사회에 퍼져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게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의 음성을 들으니 
성경 요한복음 12:27~34
찬송 540장(통 219장)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과 피조물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했던 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진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기에 처음에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고 절규하였지만 곧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쁘게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참다운 용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귀중한 것임을 깨닫고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일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다운 용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환경적인 사람은 자신을 저주하고, 부정하고, 열등의식에 살다가 결국 실패하지만 사명적인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끝없는 가능성을 보고 노력하며 살다가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한다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명이 있었기에 33세의 젊은 나이에도 십자가의 죽음을 담대하게 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명을 감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직접 들려주셨습니다. 어린아이 사무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했을 때 엘리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하나님이 멀리서 희미하게 말씀하시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목소리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음성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의 사명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들립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하나님 말씀에 전념하고, 믿음으로 확고히 서서 여러 혼란을 물리쳐야 하며,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하나님께서 감동 주신 진리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목숨 걸고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여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각자가 맡은 사명에 충실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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