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명호의 시네마레터 ▶ 작가를 꿈꾸었으나 회사원이 된 후배 C에게.
<스카이 크롤러>(오시이 마모루 감독, 2008년작)어쩌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88만원 세대로도 모자라 77만원 세대를 양산하기 시작한 경제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녕 두려운 것은 우리 인생을 지금보다 더 좋은 이야기,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살아내지 못할 때, 유이치나 스이토처럼 무의미성으로 가득 찬 일상을 마주할 때가 아닐지.
기억할지 모르겠다. 작가를 꿈꾸던 네가 어느 날 신학대학원엘 간다며 찾아왔을 때, 난 적이 당황했다. 입학 2주 만에 신대원을 그만두고 취직하겠다고 다시 찾아온 날, 이 말을 했던 것 같다.
“살아간다는 건 다름 아닌 ‘이야기’를 산다는 게 아닌가 싶어.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사는 거지. 그 이야기에는 항상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되풀이되지만, 어떤 게 잘한 결정인지는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할 거야. 중요한 건 어떤 선택, 어떤 결정을 하든 자신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도널드 밀러도 최근에 나온 <천 년 동안 백만 마일>(IVP 펴냄)에서 인생을 이야기로 보더구나. 저마다 자기 앞의 생이 누군가 써나가는 이야기이고 우리 각자가 그 이야기 속 인물이라면, 지금 우리는 그 이야기의 어느 지점을 살고 있는 걸까? 작가의 의도대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살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지리멸렬하게, 아무 목적이나 지향 없이 (아니, 작가의 목적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 안주하여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
<스카이 크롤러>(The Sky Crawlers)는 이런 생각이 조각구름처럼 퍼지기 시작한 머릿속을 가로지르며 비행의 궤적을 남긴 영화였다. 영화는 전투기들이 벌이는 공중전 장면을 빼고는 거의 채도가 낮은 색감으로 느리게 흘렀다. 시대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영화 속에는 전투기의 공중전이 수시로 벌어지고 격추당한 전투기가 마을 인근에 떨어지는 일도 있음에도, 지상에는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나 국지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전쟁은 창공에만 국한될 뿐이며, 서로 소속 ‘기업’이 다른 양측 전투기 사이의 일일 따름이다.
로즈톡과 라우테른 사 간의 공중전은, 주인공 간나미 유이치가 말하듯 국가 간의 전투가 아닌 기업 간의 ‘비즈니스’일 뿐이다. 양측 모두 엄연히 사상자가 생기는데도 전쟁은 없고 모든 게 평화롭다. 로즈톡 소속 파일럿 간나미 유이치는 자신이 언제부터 전투기를 몰았는지, 언제부터 상대 전투기 조종사를 죽였는지, 자신이 왜 목숨을 건 공중전을 치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숨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오래된 일상일 따름이다.
공중전을 치르고 나면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가서 자신이 직접 격추시킨 그날 공중전의 뉴스 보도를 남의 일인 양 지켜본다. 이유도 모르고 동기도 없는 채로 공중전을 치르는 건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주민들도 마치 ‘오늘의 스포츠’를 시청하듯 공중전 보도를 지켜볼 따름이다.
주인공이 치르는 공중전의 경험은 영화의 색감만큼이나 무료한 일상일 따름이고,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몹시 차분하거나 비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두 기업의 “비즈니스”에 소모품처럼 투입되는 자신들의 처지에 분개하거나 봉기하지도 않으며, 유전자 이상으로 태어나 나이 들지도, 죽지도 않는 ‘키르도레’인 자신들의 처지와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회의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영화는 목적도, 의미도 상실한 인간의 무료함과 무의미성을 보여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간나미 유이치의 상관인 구사나기 스이토가 연인의 간청으로 권총을 쏜 건 그 때문이었을까. 스이토 자신이 스스로 권총 자살을 하려 한 것도. 바뀌지 않는 일상의 서사. 공중전에서 죽지 않는 이상,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는 그들 ‘키르도레’에겐 죽음이 유일한 ‘변화의 서사’일 뿐이다.
“너는 살아라. 뭔가가 바뀔 때까지.” 스이토의 권총 자살을 막았던 유이치는 통상적인 비행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무의미로 점철된 자신의 이야기를 차라리 끝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초계 비행에서 만난 전설적인 적기 ‘타이거’를 발견하고는 굳이 쫓아가서 전투를 벌인다. 그 전투가 그의 이야기의 결말이다.목숨을 건 전투조차 무료한 일상의 반복처럼 살아가는 영화 속 키르도레들을 보면서 후배인 너를 생각했다. 대학 시절 작가를 꿈꾸었으나 2년 여만에 동남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신대원을 들어가고 2주가 못 되어 그만두고 다시 생활 전선에 복무하는 너를. 그리고 일상의 무의미를 살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키르도레’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88만원 세대로도 모자라 77만원 세대를 양산하기 시작한 경제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끝없는 비정규직의 운명이나 빈곤의 대물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가 소유자이면서도 하우스푸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가계대출의 시한폭탄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녕 두려운 것은 우리 인생을 지금보다 더 좋은 이야기,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살아내지 못할 때, 유이치나 스이토처럼 무의미성으로 가득 찬 일상을 마주할 때가 아닐지. 우리를 주인공 삼아 한 편의 걸작(masterpiece)을 써나가는 거장(Master)의 붓끝을 배반하거나 외면하는 순간이 아닐지. 이야말로 우리의 현재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할지라도, 조금이나마 더 자신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할 때가 내겐 가장 큰 고통이었다”고 한 미우라 아야코의 말이 방금 읽은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건.
옥명호
- 기자명 옥명호
- 입력 2010.11.17
- 호수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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