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현실에서 살아가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이 두 주인의 어느 중간쯤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어정쩡하게 적당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다고 덥석 주저앉아버려야 하겠는가?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라는 자리를 지켜 가면서 그야말로 원만하게(?) 살아가야 하겠는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저 막강한 중세 교회의 권력과 권위에 맞설 수 있었을까?
이 개혁가들 가운데 곧장 떠오르는 인물은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1324-1384)와 그의 뒤를 이어 나타난 보헤미아의 후스(1369-1415)이다.

 

존 위클리프
위클리프는 교권의 타락을 폭로하고 나왔다. 교황 무오류설을 공박하고 그를 '적그리스도'라고까지 했다. 그는 아무나 읽을 수 있도록 고전어로 된 성경을 토박이 영어로 옮겨놓고자 했다. 교회개혁의 꿈조차 꾸지 못할 캄캄한 밤에 빛을 비춘 '종교개혁의 새벽 별'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타난 개혁가 후스도 교회를 비판하고 나왔다. 당연히 교회가 발부한 면죄부도 그의 비판 대상이었다. 화형대에서 처형되기까지 그는 조그마한 흔들림도 없이 줄기차게 교회의 개혁을 외쳤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개혁의 선봉군이었다.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교묘한 술책을 고안해 내어 교중을 우롱하는 것을 이들은 차마 견딜 수 없었다. 성직자들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한낱 도구로 떨어져버린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성직자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버린 무지한 교중을 깨우쳐야 한다고 믿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 결코 어떤 인간이, 교황이라는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했다.

이것은 결단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교권을 거머쥔 세력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세력은 어떤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돈을 풀 수 있었고, 어떤 사람도 달랠 수 있고 어떤 사람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명예와 권력을 줄 수 있는, 실로 막강한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요한후스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돈과 명예와 권력 앞에 그 어느 누구인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과 명예와 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애써 일하고 또 일한다. 실제로 이미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갖기 위해서 엄청난 궁리를 하고 또 수고를 했을 테고, 그만한 명예를 갖게 된 사람이나, 그만한 권력을 얻게 된 사람 모두 그 명예와 권력을 획득할 때까지 그들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이란 평범한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관심을 두는 목적이 다를 수 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쟁취와는 다른 어디에 자신의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다른 모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자기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바로 그러한 보기이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겠다고 아옹다옹 다투는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분명한 것 하나가 있는데,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뒤따르는 그러한 세상 상식에 기대어 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갔다. 금이 박힌 모자에다 주황색을 더한 화려한 옷차림을 한 교황청이 뿌리고 다녔던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독을 들이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성경의 말씀과, 부패한 교회와 교권 세력의 자기 정당화 논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씀을 섬길진대 부패한 교회와 교권의 유혹을 과감히 내버려야 했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든지, 한쪽을 귀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었다. 하나님과 재물과 거기에 따라오는 명예와 권력을 같이 섬길 수 없었다.

우리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어떻게 우리가 감히 지난날의 개혁가들처럼 그 어마어마한 권력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들처럼 격조 높게 모든 회유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순교는커녕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알고 지키지 못할 멍청이고 못난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예 두 주인을 같이 다 섬기겠다고 작정하고 나서야 할까? 두 쪽을 다 사랑하고 두 쪽을 다 귀히 여기면서 두루뭉술하게 살아가야 하겠는가? 아니,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가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이 두 주인의 어느 중간쯤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어정쩡하게 적당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다고 덥석 주저앉아버려야 하겠는가?

심지어는,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라는 자리를 지켜 가면서 그야말로 원만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 기독교인’의 최선책이며, 그것을 인생의 좌표로 삼아 그러한 삶의 방식을 내심 다짐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너무 따지지 말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어찌 보면 전혀 모나지 않는 호인으로 아주 둥글둥글하게 세상 돌아가는 데로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어중간하게 흐릿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삶을 은연중에 두둔하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재치와 지혜를 주십사’ 엉뚱한 기도를 드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우리가 두 주인을 혼돈하지 말게 하시고, 두 주인을 적당히 섬기겠다는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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