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사람 부흥회’ 준비하는 어느 노 목사의 마음

부흥회 후에 교인 몇이 큰 교회에 다니겠다며 읍내 교회로 옮겨갔다. 무교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한 백 목사님이나 교인들은 아픔이고 상처였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믿음의 소망을 든든하게 하고자 ‘두 세 사람 부흥회’를 갖기로 했다.


‘부흥회’ 하면 특별한 강사를 모시고 많은 교인이 뜨거운 분위기로 은혜 받는 집회를 연상한다. 불신자를 데려다가 복음을 듣게 하고 교인들도 다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회가 꼭 그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잘못된 생활을 회개하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며,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간구하는 하박국의 기도이다.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심령부흥회’라는 말이다.


‘심령부흥회’ 그 아련한 기억

도양읍에서 용정리를 거쳐 높은 산을 넘어서야 찾아갈 수 있었던 외진 마을 장예 부락. 득량만 푸른 바다를 품에 안듯 바라보며 포근하게 들어앉은 작은 포구에 장예순복음산돌교회가 있다.
부흥회 첫 날.
녹동에서 저녁을 먹고 집회시간에 맞춰 예배당을 찾아갈 때는 한참을 헤맸다. 높은 종탑에 빨갛게 켜져 있을 십자가를 찾았지만 예상 거리를 지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둑해진 도로 가에서 마른 벼를 거두고 있는 분을 만났다.

“산돌교회가 어디입니까?”
농촌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면 믿지 않는 마을주민들까지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초청도 할 겸 이렇게 물었다.
“요 앞이요~.”
일하던 손을 들어 가르치는 길 건너편을 가만히 바라보니 두세 칸 창밖으로 불이 비치는 건물이 보인다.

사랑방 같은 작은 예배당에는 의자가 한 줄로 다섯 개가 놓였고, 앉아서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자리도 널찍하다. 권사님 한 분이 나와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고장 난 엠프와 종탑 네온을 손보려고 읍내에서 기술자가 왔는데 고치지 못하고 갔어요.”
이 마을에 살면서 예배당을 지키는 주미영 권사님은 그리 말하며 미안해한다.
장예산돌교회는 수년 전에 도양순복음교회 백영자 목사님이 교회 없는 오지에 다니며 전도해서 세운 몇 교회들 가운데 하나이다.

녹동에서 선박을 이용하거나 용정리에서 산을 넘어야 올 수 있는 곳이어서 ‘산 너머’로 불렸던 작은 마을인데 지금은 해안도로가 연결되고 방조제와 선착장도 만들어졌다. 교회를 맡은 전임 목회자가 없어서 주일과 수요일이면 도양순복음교회 교역자가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하고, 새벽기도회는 교인들끼리 모인다. 교회가 자체적으로 교역자를 모실만한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다.
부흥회에 참석한 30여 명 가운데 산돌교회 가족은 7명이었다. 주미영 김재엽 권사님과 황옥란 김만례 한영업 집사님과 몇 분이다.

집회시간마다 읍내에 있는 도양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함께했다. 소수가 모이는 작은 교회 믿음의 형제들이 은혜 받고 성장하며 힘 있게 교회를 섬기게 하려는 관심과 사랑의 협력이었다.
이 집사님이 찬양반주기에 맞춰서 찬양을 인도하고,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밤낮으로 그리고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간절한 통성기도와 찬송으로 마음을 쏟으니 산돌교회 교인들이 은혜 충만한 분위기다.

‘기독교의 기본도리’와 ‘신앙생활 지침’을 쉽게 풀어주고, 권사님과 집사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눈다. 장예산돌교회의 기둥이고 역사인 몇 분 성도들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믿음과 소망이 든든해지는 시간이었다.
부흥회 후에도 산돌교회 성도들의 신실하고 다정다감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교인 몇이 큰 교회에 다니겠다며 읍내 교회로 옮겨갔다. 무교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한 백 목사님이나 교인들은 아픔이고 상처였다.


큰 교회 찾아 떠난 교인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믿음의 소망을 든든하게 하고자 ‘두 세 사람 부흥회’를 갖기로 했다.
내가 광주신학교 재학 때 양과리교회(광주광역시 남구)를 다니며 예배를 인도했었다. 교회가 설립되어 여러 해 지나도록 성장하지 못했다. 그 마을에 초가는 예배당뿐이었다. 목회자도 떠났다. 문을 닫게 된 형편에 그 지역이 고향인 최 목사님 부탁으로 주일과 수요일 예배를 맡았다. 어느 주일은 할아버지 한 분만 나오셨다. 그래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 말씀에 붙들려 열심히 설교했다. 그런 교회가 지금은 든든한 교회로 성장했다.

 

동산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에는 나 홀로 새벽기도회가 많았다. 한두 사람이라도 나오면 눈을 맞추며 말씀을 나누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두세 사람 부흥회’ 라는 말을 사용해본다. 한 사람이 교회의 시작이고 겨자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글 사진=황영준 목사
광주동산교회를 30년 동안 목회한 뒤 원로목사로 은퇴하였다. 현재는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교회 등을 찾아서 섬기고 있으며 전국의 농어촌교회를 찾아 살아 있는 역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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