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명호의 시네마레터 ▶ 남녘의 외진 산골에서 목회하시는 J 목사님께.
<울지마, 톤즈>(이태석 출연/ 이금희(내레이션), 구수환 감독, 2010)


황폐한 톤즈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아무도, 아무에게도 돌봄을 경험한 적 없는 한센병자들과, 인생을 배우기 전에 먼저 총을 들고 전쟁을 배우는 아이들, 악성 말라리아와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생명을 다해 불꽃을 피우며 열애한 그의 ‘연인’이었습니다.

 

J목사님, 지금쯤 산그림자가 일찍 내려온 마을은 문득 고요하겠지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도시로 떠나간 주인 잃은 집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목사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사람 손을 타는 것마다 못쓰게 되어 버려지는데, 사람 손이 닿아야 건재한 게 집이라던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주인이 떠난 집 마당엔 쑥부쟁이며 개미취, 코스모스들이 요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겠지요. 허물어진 담을 담쟁이넝쿨이 별 수고 없이 기어오르고 있을 테고, 사람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랜 슬레이트집 지붕엔 잡초가 틈을 비집고 올라왔을 거고요.
아스팔트 위로 분분히 지는 은행잎을 맞으며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지금, 태풍 뎬무가 상흔을 남긴 작은 교회당을 수리하며 겨울 준비를 하고 계실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최근 본 다큐멘터리 영화 탓일지도 모르겠군요.


톤즈 사람들의 멈추지 않는 눈물

“하느님이 왜 할 일 많은 우리 신부님을 데려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데려가시려면 저를 데려가셔야지요.”
울먹이던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신부님”의 죽음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톤즈 사람들의 눈물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톤즈의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사는 라이촉 마을 이장은, 쫄리 신부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였다고 했습니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한 아순다 할머니는 쫄리 신부님 사진을 집안 창가에 고이 올려두고는 경건하게 기도를 올린 뒤, 신부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할 거예요, 한 마디를 하고선 앞 못보는 눈으로 다시 눈물을 쏟았습니다.

한국인 신부 최초로 아프리카 남부 수단에서 사역한 고(故) 이태석 신부. 긴급구호전문가 한비야 씨조차 “근래에 가본 곳 중 가장 최악”이었다는 남부 수단의 톤즈에서 그는 “쫄리(John Lee) 신부님”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톤즈에 오셨다면, 성당을 먼저 세우셨을까, 학교를 먼저 세우셨을까?’ 스스로 던진 물음의 답으로 ‘학교’를 먼저 세우고, 무기를 들었던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가르친 브라스밴드팀 아이들도 그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 그의 투병생활과 장례미사 영상을 보여 주자, 하나둘 눈물을 훔치던 아이들이 기어이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나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자란 이태석 신부. 의과대학을 나와 인턴까지 마친 아들이 수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말리지 않을 어머니가 있을까요. 자식 둘이 신부와 수녀가 된  마당에 “둘이면 됐지 않냐”는 어머니의 만류는 아들의 간절하고 뜨거운 서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에는 신학생 시절 방문한 적 있는 그 “최악”의 땅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아들을, 박수치며 보낼 모정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이 역시 사람의 정리(情理)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향한 ‘연탄재’신앙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마 25:45 참조). 이 구절이 그의 신앙이자 신학이었고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곁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지 않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휴가차 ‘잠시’ 들른 고국행이 ‘영’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휴가 중 지인의 강권에 못이겨 받은 정기검진 결과는 충격이었습니다. 대장암 말기. 이태석 신부의 주요 신체기관은 커다란 암덩어리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몸을 밤낮없이 돌보는 사이, 정작 그의 몸은 죽음의 세포에 잠식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낙담했습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보다도 다시는 톤즈로 돌아갈 수 없어서였습니다. 가야 한다고, 그래도 가겠다고 나서는 그를 모두가 말려야 했다는군요.
암환우들이 요양하는 수도원에서 투병하던 그가 수도원의 작은 음악회에서 부른 노래는 “열애”였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그에게는 황폐한 톤즈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아무도, 아무에게도 돌봄을 경험한 적 없는 한센병자들과, 인생을 배우기 전 총기를 들고 전쟁을 배워야 했던 아이들, 악성 말라리아와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사람들, 식수가 없어서 흙탕물을, 그것도 온갖 세균으로 오염된 물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2~3일 밤낮을 걸어 치료를 받으러 오던 환자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수시로 병원 문을 두드리던 이들, 잦은 국지전으로 총상을 입고 실려오던 군인들, 바로 그들이야말로 생명을 다해 불꽃을 피우며 열애한 ‘연인’이었습니다.

노랫말보다 더 뜨거운 그의 노랫소리는, 그의 가슴을 뚫고 나와 수도원 앞뜰을 지나 늦가을 하늘로 날아올라 톤즈까지 가닿을 것만 같았습니다.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아가며 끝까지 톤즈로 돌아갈 의지를 불태우던 그는 결국 그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전쟁과 분쟁의 상처와 분노, 질병의 고통, 기아의 비참 가운데서 살아가던 그들을 처음으로 존중하고 대우하고 치료하고 만져 준 사람 “쫄리 신부”는 살아서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J 목사님,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명치께가 여전히 저릿저릿합니다. 물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신앙이 어떻게 삶으로, 땅으로 내려와야 하는지, 어느 시인의 시를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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