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공은 하나님의 복일까?

하나님은 남녀의 구별이나, 나이의 구별, 권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배분되었고, 다른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길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다.

 

물질적 복은 하나님이 내려주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교회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성공=복’ 공식에 대해 강원돈 한신대 교수는 단호하게 “노”라고 말했다. 아니 오히려 돈을 멀리하는 삶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가 주최한 평신도아카데미 ‘자본과 하나님’ 강좌에서 ‘땅을 발 아래 두어라’라는 창세기 1장 28절에 담긴 경제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다른 피조물공동체와 상생과 공생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뜻이죠. ‘땅을 발 아래 두는 일’을 라틴어로 표기하면 ‘도미니움 떼레’(dominium terrae)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동활동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경제활동은 돈을 풍족하게 버는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의지적인 노동이라는 설명이다.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벌거나 소비하는 행위는 이 기준에서 보면 온전한 경제활동은 아닌 것이다.

강원돈 교수는 이상적인 경제공동체의 표본을 출애굽 공동체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남녀의 구별이나, 나이의 구별, 권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배분되었고, 다른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길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다.
특히 그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주목했다.

먼저 온 일꾼이나 나중에 온 일꾼이나 똑같은 대가를 받은 것은 분명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 원칙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이 비유가 합당치 않게 들려지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업적과 그에 따른 보상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를 봅니다.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요.”

우리 눈에 일할 기회가 없거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해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포도원 농부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반성이다.
자본은 어느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이 주어질 정도로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마치 하나님의 복인 양 일용할 양식 이상을 좇는 데 있다. 강 교수는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복을 강조하는 설교는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도운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면서 “이런 설교는 비정규직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과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젊은이들을 가난으로 몰고 가는 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우려했다.

결국 우리가 필요 이상의 자본을 좇는 사이, 고통 받는 이웃들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성경은 ‘일용할 양식’ 이상의 자본을 축적하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인 듯 혼동하는 탓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돈 한 푼 안 쓰고 1년 살기>(부글 펴냄)의 저자 마크 보일도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것을 팽개치면서 고유의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한 대상을 숭배하고 있다”며 “더욱 심각한 것은 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평등, 환경파괴와 인간에 대한 경멸을 촉진하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자본의 본질을 분석했다.
자본의 논리는 생명의 원칙인 ‘도미니움 떼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성경은 자본과 하나님 중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고 명령하신다.

이범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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