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교회는 성경이 담고 있는 상상의 힘을 못 본 채 지나치고 성경이 내뿜는 상상의 힘을 막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자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에 빌붙어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그 지배 체제를 후원하면서 마침내 그 체제와 운명을 같이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꼭 100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국권을 잃게 되었다는 비통한 소식을 접한 것은 이광수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던 때였습니다. 아직 작가로, 사상가로 인정받기 이전이었지만 누구보다 영민했던 청년 이 광수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벽 3시에 그는 교회에 가서 종을 쳤습니다. 학생들이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광수는 그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구약 성경을 펼쳤습니다. 강대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비통한 정경을 그린 ‘예레미아 애가’를 그가 읽어내려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 강탈기가 시작될 무렵의 교회 공동체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비탄과 절망을 성경의 말씀에 기대어 풀이하고, 그 슬픔과 아픔 너머의 어떤 세계를 그려주고 가리켜주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청년 춘원의 ‘예레미아 애가’
일본에 국권이 넘어간 다음, 집회와 결사와 언론의 자유란 전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활동 모두를 금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교회가 충분히 활용하면서 여러 활동을 펼쳤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함께 모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 교인들은 한 주에도 여러 차례 회집했습니다.
교회에 모여 찬송도 함께 불러야 하고 기도도 함께 드려야 했고 성경 공부도 하고 설교라는 말씀 증거에도 함께 참여해야 했습니다. 교인이라면 교회 공동체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실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온 한 연구자가 밝힌 바를 따르면, 그때 교회에서 자주 부른 찬송가는 '십자가 군병 되어서,’'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와 같은, 그의 표현으로 "자못 전투적인 찬송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여러 성경 주제들에 대한 설교를 듣고 또 공부도 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애급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왕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이 되는 역사 이야기가 주요한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일본 강탈 체제에 맞서고 그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믿음과 소망을 키워갔습니다. 힘없고 볼품없는 노예에 지나지 않던 이스라엘 민족이 막강한 애급 왕 바로의 지배 체제를 뚫고 해방을 맞게 된 '출'애급의 이야기에서, 우리나라의 초대 기독교인들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의 빛으로 어두운 일제 강탈의 억압과 고난과 절망을 비춰보고 풀이코자 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우리 역사에서 돋보이는 공동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절망하여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그 가르침을 통하여 식민지 지배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제 당국자들이 교회를 일본에 적대하는 독립운동의 소굴이라고 본 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모든 점에서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삶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근본의 대안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은 성경이 담아 뿜어내고 있는 상상력에 놓여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상상력의 틀에서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마음을 일궈야 했습니다.
성경에 터하여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기독교인은 어떤 것을 절대시하여 그것에 굴복하거나 어떤 것을 영원하다고 믿고 그 밑에 안주하여 그 절대라고 하는 것, 그 영원하다고 하는 것에 갇혀서는 안 되었습니다. 교회는 절대라고 하는 것, 영원이라고 하는 것에 압도되어 모든 상상력을 잃어버린 꽉 막힌 삶을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조선 나라, 대한제국을 회복하는 데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근거로 삼고 그것을 최종 목표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한 핏줄이라고 해서 그것이 절대이고 그것이 영원일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에는, 기독교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넘어서시는 하나님, 절대이시고 영원이신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입니다.
거대한 억압의 체제 밑에서 다른 어떤 대안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판국에서도, 그것을 돌파하여 그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해방의 상상력을 성경은 당당하게 뿜어내었습니다.
해방의 상상력으로 당당하게
이 줄기찬 해방의 상상력 앞에 굴복하지 않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별별 것을 절대화하고 별별 것을 찬양하고 별별 것을 예배하며 별별 것을 믿고 있을 때, 성경은 그 따위 거짓되고 헛된 의식에서 벗어나라며 해방의 상상력을 불어넣어줍니다. 참다운 교회는, 참다운 기독교인은 이 해방의 상상력에 화답합니다. 일제 강탈기의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해방의 상상력에 자신의 생각과 삶을 맡기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오늘날 우리 교회는 성경이 담고 있는 상상의 힘을 못 본 채 지나치고 성경이 내뿜는 상상의 힘을 막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자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에 빌붙어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그 지배 체제를 후원하면서 마침내 그 체제와 운명을 같이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위주의 물질문화에 교회가 빠져들어 그 문화와 한통속이 되어, 그것을 변호하고 대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체제의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하기를 외쳐야 할 교회가 어처구니없게도 성경이 일러주는 해방 상상력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억압하는 기괴한 작태를 부리게 되었습니다.여기서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은 스스로 제법 지혜롭고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번질나게 상층부로 올라가 거기에 진을 치게 된 그 지혜와 능력을 거드름피우며 과시합니다. 경제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며 그것이 유일한 가치인 양 몰아가는 우리 사회의 지배문화에 발맞춰 매끄럽게 살아가는 그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강자가 되는 지름길이고,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는 엉뚱한 믿음에 붙박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교인이 어느새 애급 왕 바로의 체제 세력과 동조하여 그 체제를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체제에 맞서 그 체제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상상력이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에게는 두렵고 무섭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안정된 삶을 위협하기에 그렇습니다. 하여, 교회가, 교인이 해방 상상력을 억압하고 그것을 팽개치게 되었습니다.
그 해방의 상상력이 기독교 안에서조차 쇠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질의 부', '부자 되기', '소비 즐기기', '결국은 경제다' 하는 별의별 구호가 판치며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새로운 식민 지배 체제에 우리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경술국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체제와 하나 되어 성경이 일러주는 해방의 상상력을 질식시켜 압살시키고 있습니다.그 상상력을 다시 살릴 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해방 상상력'을 가슴에 안고 할 일 많은 금수강산 삼천리 반도 그 한 복판으로 일하러 나아갑니다.
박영신
- 기자명 박영신
- 입력 2010.09.01
- 호수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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