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아내에게>

1주기가 되기까지 그는 일상의 갈피마다 남아 있는 아내의 모습과 맞닥뜨립니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사쿠라는 공기처럼 가벼웠지만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미안하다며,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오열하는 순스케의 모습은 영화 속 장면만은 아닐 것입니다. 뒤늦게 철드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눈물이자 회한이겠지요.


“집은, 더불어 사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에 산다.”
사랑하는 혜진, 기억하나요? 이제는 잘 들르지도, 꾸미지도 않는 미니홈피를 처음 시작할 적 문패에 올린 글 말이에요. 13년 전 결혼예비학교에서 처음 해본 성격유형검사[MBTI] 결과가 어쩜 그리도 상극이던지. 성향과 기질뿐 아니라, 성장 배경조차 그대(이과)와 나(문과)의 전공계열만큼이나 서로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지요.

대대로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목회자 집안의 셋째 딸과 경상도 끝자락 거제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온 불교 집안의 막내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은, 그저 미역국에 쇠고기를 넣을지, 도다리를 넣을지를 결정하는 과정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대가 돼지갈비를 먹고 싶어할 때 난 고등어구이를 그리워했고, 내가 한 시간 넘게 하루 일과를 수다로 풀면 그대는 5분을 넘기는 적이 드물었어요.


항상 사전 계획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며 제시간보다 먼저 와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대와 달리, 상황에 따라 일정과 계획은 늘 바뀔 수 있다고 여겼던 내 시계바늘은 세상의 평균 속도에 항상 미달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의진이가 아빠를 ‘나무늘보’에 비유했을까요.)
그런 우리가 열세 해 동안 서로 용납하고 자기를 내어주며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기적이지요! 은총이고요! 이 기적과 은총을 나는 기꺼이 즐기며 감사히 여기며 행복해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 남자에게 남은 아내의 뒷모습

사랑하는 혜진, 오늘은 <그 남자가 아내에게>의 젊은 일본인 부부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결혼한 지 한 십 년 되었을까요. 남편 순스케는 꽤 이름난 사진작가인데, 위인이 좀 철이 없는 데다 꽤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가정 경제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관심 밖이고, 몸에 좋은 음식이나 차를 권하며 끊임없이 건강을 챙기는 아내를 귀찮아합니다.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에서조차 이 철딱서니 남편은 침대와 붙어 지내기 일쑤여서, 별이 빛나는 밤길을 함께 거닐자는 아내를 홱 밀쳐버립니다. 남녀관계도 자유분방한 편이어서 호시탐탐 아내 몰래 노닥거릴 건수를 노리곤 합니다.

사쿠라는 여전히 남편과 함께하기를 좋아하고, 남편의 건강을 위해 신문에 난 건강 정보를 스크랩하며,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어지간한 남편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밝게 조잘거리는 모습은 마치 맑은 아침을 부르는 참새를 닮았습니다. 물건을 소소하게 잘 흘리고 다니는 엉성함은 나하고 비슷한 단점이겠지요.


아이를 갖기 원하지만 콧방귀만 뀌는 남편 때문에 속상해하는 사쿠라는 순스케의 철없음조차 사랑하는 듯 그의 연약함과 허물을 결코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사쿠라를 어리보기마냥 보이게도 하지만, 콩깍지가 눈에서 벗겨져도 사랑은 그럴 수 있다 싶더군요. 성숙해 갈수록 나를 비워내는 대신 상대를 품는 공간이 늘어나는 게 사랑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리 이상주의 사고를 지닌 여성이라 해도 남자에 견줘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한다는 게 대체로 확인된 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스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나도 재정에 관한 한 무디고 무신경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나 월급이 안정적이지 않던 신혼 초 잡지사 생활은 더욱 그대의 현실적 염려를 부채질하고도 남았을 테지요. 생활을 염려하는 그대를 신앙인이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나무라던 내가 철없는 순스케보다 더 나빴었지 싶은 생각에 몸이 오그라드는군요.

사쿠라의 바람대로 부부는 오키나와 여행을 떠나지요. 여행지에서도 사쿠라는 순스케에게 건강식을 챙기고, 산책을 종용하고, 사진을 찍어달라 조릅니다. 반면, 순스케는 자기 건강은 자기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말라며, “당신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면박을 주지요.


“나랑은 상관없는 거구나.” 평소와 달리 순스케가 쏘아붙인 말을 읊조리는 사쿠라의 얼굴에서는 금세 눈물 한 바가지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침대에 들러붙은 순스케를 떼내어 별밤 아래로 산보를 가려 하지만, 순스케의 거센 뿌리침에 방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사쿠라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집니다.

여행 마지막 날, 사진을 찍어달라던 사쿠라는 반지를 숙소에 두고 온 걸 알아차립니다. 반지를 찾으러 급히 달음질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순스케는 문득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사쿠라의 생전 마지막 모습으로 남습니다.


다시 만나자는 인사로 기억되기를

눈을 뜨면 참새처럼 늘 곁에서 조잘댈 것 같았던 아내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순스케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1주기가 되기까지 그는 일상의 갈피마다 남아 있는 아내의 모습과 맞닥뜨립니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사쿠라는 공기처럼 가벼웠지만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미안하다며,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오열하는 순스케의 모습은 영화 속 장면만은 아닐 것입니다. 뒤늦게 철드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눈물이자 회한이겠지요.

“둘이 함께 건강하게 황혼을 맞이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혜진, 기억나나요? 결혼 소식을 전하는 편지에 올린 기도문 한 구절이. 영화 속 두 남녀를 보면서 그 기도문이 선명히 떠올랐던 건, 순스케처럼 아내의 뒷모습을 마지막 기억으로 새기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뒷모습으로 남은 이에게 못다 한 말을 품은 채 회한의 시간을 보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함께한 지난 모든 시간에 대한 감사와 용서를 나누지도 못한 채, 서로 허망한 뒷모습으로 남겨지지 않도록 사랑의 수고를 더 힘써야겠단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모든 감사와 용서와 사랑의 말을 나눈 뒤, “곧, 다시 만나요”라며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혜진, 좁고 볼품없는 집이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우리 집이 가장 아름다운 건 당신과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순스케처럼 여전히 미숙하지만, 그대와 함께여서 나는 조금씩이나마 온전함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남자가 아내에게>(토요카와 에츠시, 야쿠시마루 히로코 |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2010년 작)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