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65주년을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8.15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감동도 자아내지 않는 죽은 언어, 곧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 우리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료 상태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민족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국과 함께 서해와 동해에서 군사훈련을 벌이자, 북한은 해안포 사격 훈련을 통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참 딱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단의식이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 백성일 따름입니다.

희망은 없다

이러한 때 예레미야 애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빌론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유린된 조국 산천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애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지도자들의 잘못도 큽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고, 불의를 방조하거나 조장합니다. 의인들은 핍박받고 입에 재갈이 물리워집니다. 이런 세상은 몰락을 앞둔 세상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큰 죄는 예언자들에게 있습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불의한 현실을 보면 사자처럼 일어나 그것을 꾸짖어야 하고, 역사가 나락으로 떨어져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을 때는 자기 속의 절망을 베어내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예언자들의 말은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참 소리 앞에서 귀를 닫는 것은 예나 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참 소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역사는 묵정밭이 되고 맙니다.

종교의 타락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문화의 고갱이는 종교이고, 문화 현상은 그 시대의 종교가 외적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말일 겁니다. 소비주의, 물질주의, 피상적인 관계맺음, 몰인정한 세태, 생명에 대한 경시, 폭력과 불화의 증대 등은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이들은 많지만,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당연합니다.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 한계에 직면하고, 그 때문에 어쩔 줄 모를 때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은총, 화해, 정의, 평화에 대한 말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적습니다. ‘소리’와 ‘정체’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참됨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입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우리는 삶으로 그것을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은 모험이요 결단이요 책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모세는 홍해를 향해 팔을 내밀었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향해 함성을 질렀고, 베드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로 뛰어들었고,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희망은 있다

예레미야 애가는 탄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낮아진 자리에서 예언자는 문득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과 의지에 바탕을 둔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희망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 곧 헤세드(hesed)입니다. 사람은 신실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희망의 뿌리입니다.

미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일컬어지는 도로시 데이는 젊은 날 불의한 사회 현실에 침묵하는 교회에 분노해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이끌림조차 뿌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극작가인 유진 오닐이 낭송하는 프랜시스 톰슨의 시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 시에서 사냥개는 하나님의 은유입니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포기하는 법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밤낮 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하나님은 서두르지도 않고 흐트러짐도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삶에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고통과 악이 가득 찬 세상이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에는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새 날, 새 역사는 새 마음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우리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려는 열망을 품을 때 새로운 역사는 시작됩니다.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청년 실업자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이들, 노인과 장애인, 이주 노동자들,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이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가장 절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 곁에 머무십니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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