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감시용 지하 비밀 통로가 있는 마을,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아들을 제거하려는 마을은 칼 포퍼가 말한 ‘닫힌 사회’(the closed society)를 떠올립니다. 칼 포퍼는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제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되는 사회’를 닫힌 사회로 규정했지요.

거의 반년 만에 아내와 영화를 보러갔습니다. 함께 가서 따로 보았습니다. 극장까지는 ‘함께’였지만, 영화는 ‘따로’였습니다. 저는 원고를 쓰기 위해 <이끼>를, 아내는 아무 부담 없이 <나잇 & 데이>를 선택했지요. 로맨틱코미디나 휴먼멜로 취향의 아내에게 <이끼>는 언감생심입니다. ‘남편과 함께’여도 싫은 일이 있다면, 딱 이 경우일 것입니다.

<이끼>는 제게도 편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꽤 죽어나갑니다. 하드코어 영화처럼 잔혹하지 않다 하여, 기도원의 집단 몰사나 불길 속에 사람이 타 죽는 장면들이 편하다곤 할 수 없겠지요.
사주를 받은 죄수가 다른 수인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수차례 찌르거나 잠든 사람의 발바닥을 칼로 그어버리는 등 폭력적이고 섬뜩한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더 있군요. 이 영화는 홍보 포스터에 나오듯 장르상 ‘서스펜스’(suspense)를 표방합니다. 긴장감으로 관객의 심리를 몰아붙이는 데 성공할수록 흥행성이 높아지는 영화인 셈이지요.

서스펜스 범죄드라마 <이끼>는 저를 포함하여 관객을 긴장감의 올가미에 묶어 매다(suspend)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163분이라는 상영시간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스펜스를 공포물 다음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림이 ‘쎄게’ 나오는 영화들도 뇌리에 잔상이 오래 남아서 되도록 피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긴장감에 내몰려 영상과 스토리를 좇아가느라 가장 불편했던 건 따로 있었단 걸 몰랐습니다. 영화를 본 지 이틀이나 지난 지금, 저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건 <이끼>의 ‘시골 마을’을 옥죄는 비밀과 통제, 그리고 폐쇄성입니다.

의절하다시피 지내 온 아버지의 부고에 달려간 시골 마을에서 유해국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낯선 이방인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이장 천용덕의 눈빛과 말 한 마디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그는 본능적으로 비밀을 예감합니다.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과거를 지닌 인물들입니다.


이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죽음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지, 유해국은 점점 더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비밀을 파헤치려 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나 그의 의문과 문제 제기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끼처럼 바위에 딱 달라붙어 살아!”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천 이장의 한 마디는 전제 군주를 연상케 합니다. 그때부터 유해국은 죽음의 위험에 놓입니다.

성채 같은 이장의 집은 골짜기에 파묻힌 마을을 내려다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이장은 단순히 마을만 내려다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집안 구석구석과 심지어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듯한 감옥의 망루처럼 보입니다. 마을 전체를 비추는 감옥의 감시등 같은 조명등도 이장의 집에서 켜고 끕니다.

팬옵티콘(panopticon)의 감시와 통제가 작동하는 폐쇄 사회가 생각난 이유입니다. 금융기관인 농협 지점장에서부터 공권력 기관인 경찰서와 지역 검찰간부, 심지어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일개 마을 이장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감시용 지하 비밀 통로가 있는 마을,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아들을 제거하려는 마을은 칼 포퍼가 말한 ‘닫힌 사회’(the closed society)를 떠올립니다. 칼 포퍼는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제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되는 사회’를 닫힌 사회로 규정했지요.

반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된 사회, 개인이 자기 이성을 바탕 삼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열린 사회’(the open society)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다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 진보의 원천으로서 자유를 의미하며, 권리란 지배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천 이장의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 열린 사회의 요소가 없습니다. 이 마을을 특징짓는 ‘닫힌 사회’의 징후를 영화 밖 현실에서 목격하는 일은 ‘공포’(恐怖)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겪게 되는 공포가 실체 없는 악몽이기를 바라는 희망은 가뭇없습니다. 영화를 본 뒤로도 오래 피로감이 남는 이유입니다. 아내가 “황당했지만 재밌었다”는 <나잇 & 데이>가 공연히 아쉬워지는 심정입니다.

강우석 감독
정재영, 박해일, 유준상, 유선 등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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