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1943년 독일 대학생 몇 사람이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던 이른바 ‘백장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소피 숄이다. 그는 모든 것을 민족의 영광과 경제상황에 연결 지어 침묵을 강요하는 잔인한 시대에 ‘불편한 존재’로 살았던 인물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절대의 자리에 올려놓은 나치 지배체제에 맞서, 그 체제 위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다는 더욱 높은 권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는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전통과 불화하고, 그들이 익숙해하는 관례와 미풍양속과도 끊일 날 없이 대립하였으며, 기존 질서를 등에 지고 득세하던 지배집단과도 숱하게 갈등했다. 예수는 적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해야 했던 바로 그 순간까지, 그는 여러 수준과 여러 영역에서 대립했다.

예수는 처음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형성된 질서와 거리를 두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유대교의 중심세력인 바리세파와 다툼을 빚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며, 조상들로부터 전해온 전통에 길들여진 유대인들과도 삐걱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골고다의 십자가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이 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이고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를 달리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현존하는 문화 그 자체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공감하는 셈이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바라볼 때, 예수는 주도 세력과 켕긴 상태였고, 자기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말썽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죽음으로 내몰렸다.

전통에 맞선 ‘말썽쟁이’ 예수

예수 사람이란 바로 그렇게 '불편한 존재'로 역사를 살다 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당연히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그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마땅하다. 그 '불편한 존재'로 살아간 예수를 따르는 만큼 우리도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1943년 독일 대학생 몇 사람이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던 이른바 ‘백장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소피 숄이다.
그는 모든 것을 민족의 영광과 경제상황에 연결 지어 침묵을 강요하는 잔인한 시대에 ‘불편한 존재’로 살았던 인물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절대의 자리에 올려놓은 나치 지배체제에 맞서, 그 체제 위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다는 더욱 높은 권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데 없이 포악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은 계시다’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불편한 존재됨’을 자임하고 나섰다.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찍어 대학에 뿌렸고, 바로 그 대학의 교정에서 그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어두운 감옥 창밖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어두움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밝게 보고 계시다는 듯, 그 빛은 더욱 강렬했다. 마침내 자기 오빠와 오빠의 친구와 함께 반역죄로 약식 속결 재판을 받고 그는 사형언도를 받았다. 체포된 지 닷새가 되는 날, 수평 단두대에 몸을 올려놓은 소피는 그렇게 목 베임을 당한다.

히틀러의 불편한 존재 소피 숄

하지만 우리는 소피 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됨됨이를 갖추지 못했다. 그와 같은 용기도 없고, 그와 같은 의지도 없고, 그와 같은 믿음도 없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존재’로 살며 진리의 삶을 가르치신 예수를 모른다 하고 그로부터 도망쳐 나오겠는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저버리겠는가? 그를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겠는가?

그럴 수 없다. 도망쳐 나와서도 안 되고, 저버려서도 안 되며, 이탈해서도 안 된다. 또 삶의 정황에 따라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편안한 존재로 변신해서도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불편한 존재'로 살며 가르치신 '그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우리도 이 땅에서 '불편한 존재'로 살아가야 마땅하다. 숨이 막힐 듯 마구 휘몰아치는 저 강풍과 같은 이 땅의 광기 앞에서도, 이 땅의 권세 앞에서도, '불편한 존재'로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불편한 존재'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 사람이 자아내는 그 '불편'이 아주 크기도 하고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받은 은사와 능력이 다를 수 있고 드러내야 하는 영역도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그 '하나님 나라' 사람답게 그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우리가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서 '불편한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가, 그러한 삶의 방향에 들어서 있는가, 하는 물음을 쉼 없이 스스로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작은, 그러나 의미 있는 불편을 자아내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뿐이다.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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