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옥명호의 시네마레터 ▶<맨발의 꿈>

혼자만의 꿈을 위해 앞만 보며 달리는 이들에게

맨발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나이키 축구화나 아디다스 유니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막장 인생 김원광에서 필요한 건, 막판 뒤집기 대박이 아니었습니다. 헛된 환상을 좇아 이 일 저 일 전전하기를 멈추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김원광. 나이 40대 중반의 전직 축구선수. 선수 시절 별명 “공포의 헛발질”, 현재 별명 김원‘꽝’. 수 차례 사기당하고 사업 말아먹고 빚더미에 앉은, 한마디로 인생 ‘꽝’ 난 루저(loser). 가족, 친구 등 거의 모든 인간관계도 끊기고, 대박으로 인생 뒤집기 한판승 기대하는 쪽박 인생.

 

주인공의 명세서가 이 정도면 영화가 뭘 말하려는지는 대략 가늠이 됩니다. ‘맨발’은 축구화는커녕 운동화도 없이 공을 차는 가난한 섬나라 아이들의 맨발이면서, 주인공 김원광의 맨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극빈국’ 맨발들과 ‘인생 막장’ 맨발이 만나 부대끼면서 서로의 열망 또는 패배감을 보듬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주인공은 인도네시아 현지 텔레비전에서 동티모르 뉴스를 본 뒤 오랜 식민통치와 거듭된 내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 섬나라에 인생 역전의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그럼, 희망이 있는 거네.”
허황되거나 무모한 희망의 유효기간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만입니다.
“참 희망스럽네!”
수도 딜리 공항에 도착한 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낯익은 절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기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희망이 있을 리 없습니다.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마라”는 말은 되레 가난한 이들의 궁핍을 더 잘 각인하기 십상입니다. 마치 장 콕토의 소설 <문둥병자에게 보내는 키스>에서 건강한 신부가 문둥병자에게 건넨 키스가 예수의 사랑보다는 그들의 천형 같은 질병의 현실감만 더 깨닫게 한 것처럼 말이지요.

풀 반 먼지 반인 땅에서 아이들은 맨발로도 신나게 공을 찰 수는 있지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병으로 누워 계신 엄마를 일으킬 수도, 영양불균형으로 잃어가는 시력을 되돌릴 수도, 내전의 상처로 인한 반목을 해결할 수도, 축구선수로는 힘든 왜소한 체구를 키울 수도 없습니다. 사업도, 인생도 초토화된 주인공이 커피사업을 하자던 사기꾼의 꾐에 넘어가 동티모르를 찾았지만, 그가 걸었던 마지막 희망은 축구장 먼지처럼 가뭇없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인생 ‘꽝’ 난 주인공 김원광이, 오랜 약탈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동티모르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것 자체가 역설이자 모순입니다. 이를 현실로 만드는 건, 그와 처지가 비슷한 맨발의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김원광과 다른 건,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가 생각하기도 싫은 ‘축구’였지요.

맨발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나이키 축구화나 아디다스 유니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막장 인생 김원광에서 필요한 건, 막판 뒤집기 대박이 아니었습니다. 헛된 환상을 좇아 이 일 저 일 전전하기를 멈추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결국, 김원광과 아이들은 서로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맨발’과 모든 것을 말아먹은 ‘막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를 보듬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을 때, 그들이 흘린 눈물은 서로의 가슴속으로 흘러 마음을 이어주었습니다.
“나, 이 아이들이라면 끝까지 한 번 가보고 싶어졌어!”

가족과 친구, 동포마저도 등진 자기를 믿어주는 아이들을 통해, 비로소 주인공은 구원의 빛, 희망의 징조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희망마저 접고 귀국하려던 그가 다시 아이들이 내민 손길의 온기로 다시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들 서로 손을 맞잡은 순간입니다. 거기, 비로소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꿈의 모판이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첫 출전한 세계유소년축구대회에서 서로 적대시해 온 모따비오와 라모스가 손을 맞잡을 때, 쓰러진 라모스를 모따비오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을 때, 그리하여 비로소 서로가 경원시할 대상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함께 뛰어야 할 ‘벗’이자 동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꿈은 현실화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전의 역전이 시작되듯, 인생 역전이 시작됩니다.

<맨발의 꿈>은 가난한 섬나라 맨발 아이들의 꿈을 위한 주인공의 시혜적 헌신을 그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인공이 아이들의 믿음과 신뢰의 온기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맨발’과 ‘막장’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연대의 꿈’, 할리우드 식의 메시아적 영웅에게서 주어지는 꿈이 아닌 서로를 보듬음으로써 함께 꿈꾸는 ‘신뢰의 꿈’입니다. 그 꿈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이 여름, 할리우드 액션블록버스터는 잠시 미뤄두시고, 이 연대의 꿈을 랑숭랑숭(빨리빨리) 보러 가면 좋겠습니다.

옥명호
월간지 기자로 출발하여 홍성사와 IVP에서 출판편집장 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홀로 글쓰기와 글쓰기 강좌 등에 몰두하고 있다.


<맨발의 꿈>
김태균 감독
박희순, 고창석, 페르디난도, 조세핀 등 출연
2010년 작품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