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님이 평화주의자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골호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주님은 헤롯 안티파스의 위협이 가중될 때 그를 ‘그 여우’라고 부르셨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 마당을 뒤집어엎으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위선을 꾸짖으실 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분노와 꾸짖음의 바탕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원수를 ‘좋아하라’(like)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라’(love) 하신 것이 참 다행이다. 좋고 싫음은 거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사랑은 의지적인 노력을 포함한다. 섣불리 사랑하려고 하다가는 스스로 상처입기 쉽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뿐이다. 성서에서 증언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긍휼’(compassion)이다.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com’과 ‘고통 받는다’는 뜻의 ‘passion’이 결합된 단어다. 즉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 아니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분은 우리의 삶에 연루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다. 히브리어로 긍휼(rahum)을 뜻하는 단어는 ‘자궁’(rehem)을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자궁은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감정의 자리이다.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에서 아이를 둘로 갈라 두 여인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진짜 엄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 아이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저 여자에게 넘겨주라고 말한다. 이때 ‘모정이 불타올라’로 번역된 구절이 사실은 ‘그녀의 자궁이 꿈틀하여’로 번역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고통 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이 떨린다(God's womb trembles)는 표현을 썼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려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것이 정의이다. 토라와 예언서를 꿰뚫고 있는 것 또한 불의에 대한 고발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곧 이어 ‘일용할 양식’과 ‘빚에 대한 탕감’을 청하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뜻인가? ‘밥’과 ‘빚’의 문제야말로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일이라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회사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사를 우리는 접한다. 빚에 몰려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대부업체의 돈을 빌렸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다. 주님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이런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까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부자 나라를 향해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꼭 필요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는 그 강도를 잡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사람들이 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믿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비지성적이고 문자주의적이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사람들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경고인 셈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열정을 닮지 않는 기독교인이란 이미 ‘세모꼴 동그라미’라는 말처럼 어불성설이다.
세상을 떠난 권정생 선생님은 이라크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후로 밤이면 맥박이 120에 이르고,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꼈던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가난한 한 작가가 온몸으로 아파하는 그 시간, 미국의 증권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전쟁 특수로 군수산업체의 주가가 급등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던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악마로 변한 문명의 얼굴을 본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지 60년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평화의 길이 요원하다. 평화의 길은 멀지만 우리는 기어코 그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새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
반칠환 님의 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굽힐 때 굽히고, 솟구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날 줄 알아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고통 받는 이들과 피조세계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의 정의로 세상의 불의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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