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의 시 ‘가정’의 둘째 셋째 연을 옮겨봅니다.

(……)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아버지의 신발을 기억하였습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돌아오셔서 벗어놓으신 아버지의 신발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고, 늘 낡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신발을 신어본 적이 있습니다. 슬리퍼가 없어 급히 신은 아버지의 신발은 내 발보다 넓고 길어서 그만큼의 공간이 비어 헐렁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더 사신 듯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빈 공간이 아버지가 자식들을 품기 위해 필요하였던 사랑의 공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말하는 시인의 미소를 떠올리면 아버지의 미소가 떠오릅니다. 어머니로부터 아이들에게 ‘영순위’의 자리를 빼앗겨버린 아버지는 그 어설픈 미소로써 끝내 당신의 ‘영순위’가 누구인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순위’는 어머니와 자식들 모두를 품어낸 더 큰 품이었지 싶습니다.


며칠 전 아들의 신발 크기가 아빠보다 두 치수 더 커버린 사실이 믿기지 않아 녀석이 잠들었을 때 몰래 운동화를 꺼내 신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의 신발을 신었을 때의 그 헐렁한 공간이 이번에는 아들의 신발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아들의 아버지로서 품어야 할 사랑의 공간일 텐데, 그 공간을 느끼는 저의 마음은 아들과 나 사이에 생겨버린 틈처럼 여겨졌습니다. 내게 모자라는 품의 넓이였습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