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헤리트 반 혼트호스트의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1620)이라는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그림은 요셉의 목공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소년 예수는 끌과 망치로 나무를 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양초를 밝혀 들고 있습니다. 그 불빛은 요셉과 예수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는데, 두 천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화가는 촛불을 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셔서 불을 밝혀주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여간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신뢰와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자식들을 돌보는 부모, 그리고 부모를 깊이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녀의 원형을 우리는 이 성(聖)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이어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대목은 참 중요합니다. 그는 여전히 가족 관계를 통해 배울 것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부모의 세심한 돌봄을 받고, 형제자매들과 경쟁도 하고 우애를 나누기도 하고,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면서 그는 참 사람으로 성장해야 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 칼럼을 읽다가 가슴 찡한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상호 씨는 효자입니다. 중풍을 앓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면서 그는 퇴근 후 매일 밤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잤습니다. 가벼운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어머니를 그는 정말 소중히 보살폈습니다. 그는 가끔 휴지를 둘둘 말아 김밥이라고 내밀어도 “아이구, 이거 맛있겠네” 하고, 어머니를 부축해 복도를 걷던 중 선 채 실례를 하셔도 “아이구 울 엄마 시원하겠네” 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빼빼 말라가면서도 밤에 어머니 곁을 지키는 이유는 보호자가 없으면 주무시는 어머니의 팔다리를 붕대로 침대에 고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 전날 상호씨는 간병인 아주머니께 간곡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주머니, 저, 제가 십 만원을 따로 드릴 테니 다른 아주머니 한 분하고 같이 설 전에 우리 어머니 목욕 좀 시켜 주세요.”
간호사들이 가끔 소독 거즈로 닦아드리고, 자신이 주말마다 병원 샤워실에서 어머니 목욕을 시켜 드리긴 하지만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날 간병인 두 분이 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시켜 드렸습니다.
오랜만에 편안하고 고운 모습으로 침대에 누우신 어머니의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상호씨는 준비해 온 한복을 어머니 머리맡에 두고, 머리를 빗겨드리면서 오랜만에 맑은 정신을 찾은 어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울 엄마, 올해도 병원에서 세배 받게 생겼네. 이제 얼른 나아서 내년에는 세배도 집에서 하고, 차례도 집에서 모십시다.”
다음 날 아침 상호 씨는 어머니께 한복을 입혀드리려다가 어머니가 다시는 깨지 못할 깊은 잠에 드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전이란 이런 것입니다. 보듬어 안고, 사랑으로 돌보려는 마음이 자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모두 상호 씨의 마음으로 산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와 사랑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리아의 모습에 감동합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목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늘의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어떻게 했던가요?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소년 예수가 한 말을 들은 마리아는 아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는 결코 무심하지 않다’고 중얼거렸습니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보이지 않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품이고 고향입니다.


조선대 국문과 교수인 나희덕 시인의 시 ‘나의 어머니’를 읽습니다.
시인의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많습니다. 전쟁 이후 고아를 돌보는 일을 시작했던 남편 덕분에 수많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라 독립해 나가도 여전히 어머니는 사랑의 품입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 나가 살다가 지친 아들딸들이 언제라도 돌아와 안길 수 있기에 말입니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아들도, 시집살이가 고달픈 딸도 그 품에 돌아와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친딸인 시인조차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집니다.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사모곡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자식들과 내가 / 형제처럼 사는 세상 만드시려고 /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주신 우리 어머니.”


먼 곳에서 방황하다가도 문득 돌아가 안길 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생은 살만한 곳으로 변합니다. 자식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또 그것을 되새김질하는 어머니가 계셔 예수님도 있습니다. 꼭 육신의 부모라야 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승도, 벗도, 교우도 우리의 품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혈연의 가족관계를 넘어 사랑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가 형제자매처럼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어머니가 되어주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조금씩 확장되어 나간다면, 우리 모두 누군가의 품과 고향이 되어주기로 작정한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김기석 청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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