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동행하는 예수의 얼굴을 그린 화가…3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그리스도의 얼굴(성안)
작년 6월, 르느와르 전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날, 차창 밖은 봄날의 풍경이 한창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도발적인 향기를 아름다운 빛으로 빚어낸 르느와르의 작품과 어찌나 닮았던지…. 며칠 전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루오 전을 찾아 지하철역을 나와 외진 길을 오를 때는 오히려 무뚝뚝한 빗줄기가 내렸다. 사순절 기간이었다. 어쩌면 6월의 르느와르를 만나기 위해 2월의 루오를 먼저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평범한 물상들의 빛깔을 명징하게 만들며 세상의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투박한 빗줄기 같은 루오의 작품 없이는 르느와르의 작품은 그야말로 아쉬움으로 져버릴 봄꽃에 불과할 것이었다.

20세기 미술사조는 야수파와 함께 시작된다. 야수파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 경향인데 인상파· 신인상파의 세밀한 색조 분할수법에 대하여 단순하고 대담한 변형과 굵은 선 그리고 자유분방한 터치가 특징이다. 야수파의 대표 화가는 모로의 문하생들인 마티스· 마르케· 루오를 꼽는다. 하지만 루오는 야수파의 유파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루오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본능적이면서도 힘찬 표현 때문에 야수파와 맥을 같이한다.


루오는 순전한 신앙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전통에 매이지 않는 형식을 구축했다. 작품의 내면과 작품의 방식이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경이로운 완성에 이른 데는 그가 예수와 인간의 진정성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만든 것에 집착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정성을 일깨웠다.

예수와 인간에 방점 찍은 야수파

이번 전시회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그림은 ‘성안’(聖顔)이었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종교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에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힘이 나타난다.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나아가 고난의 대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은 신념으로 그 대상들을 압도하며 이겨낸 모습이다. 억울하지만 참고 사랑과 용서로 덮으며, 깊은 고통이 있으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불의에 대해 믿음과 용기로 강력하게 대처하시는 예수.


굵은 선으로 둘러싸인 예수의 눈빛에 그렇게 살았던 삶이 쏟아져 나온다. 주황으로 상기된 얼굴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일까? 사랑의 충만 일까? 아니면 현대인의 쾌락적이고 이기주의적이며 불신앙적인 삶에 대한 분노일까? 루오는 설명 없이 우리에게 그런 예수의 얼굴을 내놓았다. 아마 그것이 이 그림의 역동성일지도 모른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는 예수의 고난을, 상처 입은 자는 예수의 사랑을, 죄 가운데 있는 자는 책망과 분노의 모습을 보게 만드는 역동성.


루오의 ‘성안’은 예수의 얼굴이 액자 속의 액자에 갇힌 듯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제 잘난 맛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들을 예수께서 액자의 틀 같은 창을 통해 들여다보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도 나와 내 가정의 얽힌 문제만을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예수와 예수의 큰 뜻을 외면하는 우리들의 인생살이를 들여다보고 계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교외의 그리스도
그러나 루오의 작품에서 예수는 관찰자보다는 동행하는 분의 이미지가 더 강조되었다. 바로 그 점이 루오의 작품이 현대인들에게 더 따스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루오는 도화사나 창기 그리고 고아 같은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무엇보다 그들 곁에는 늘 예수가 동행하셨다.
‘교외의 그리스도’를 보자. 마을 쪽에 외롭게 달이 떠 있고 그 달빛을 따라 길이 드러나 있다. 환하고 넓어서 오히려 쓸쓸한 그 길을 도화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어떤 이들은 이들이 고아라고 한다). 얼마나 고단하고 쓸쓸했을까? 바로 그 자리 그들 옆에 예수가 서 계신다. 아주 크고 가깝고 다정한 모습으로…. 루오의 작품에서 예수는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룬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현재 삶의 자리에서 인간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분이다. 음습한 건물과 휑한 길, 아무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마을에 예수로 상징 되는 달이 떴다. 그 달은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게 하고 모든 것에 따스한 온기를 준다.

어두운 마을에 예수의 달이 뜨다

우리는 과도한 업무와 경쟁으로 매일 긴장 속에 살아간다. 넉넉한 시간과 경제가 불러온 쾌락의 유혹 속에서 흔들린다. 그런 우리는 때로는 도화사이거나 윤리적으로 보면 창기의 모습일 수 있으며, 인간관계에선 고아일 수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동행하는 예수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고, 우리 앞에 서 있는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를 보면서 말이다.
루오 전과 함께 모네 전도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연못, 여인, 수련과 빛의 모네는 충분히 우리를 따뜻하게 적셔준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에만 넋 놓을 수 없는 우리들이다. 우리에겐 루오의 예수가 필요하다. 인생의 구원을 위해 고난 받고, 삭막하고 힘든 시대에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평생 그 예수를 그렸고 또 그림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루오, 우리가 루오의 예수를 만나야 하는 까닭이다.

최형철
원주 바른길교회 목사이며, 그림과 글을 통해 영성을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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