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서른 살쯤 된 다음 집을 떠나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 어느 시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밖에 서서 그가 무리를 향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예수에게 일러주었다.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계십니다.”
예수의 대답은 오히려 물음의 형식을 띤 채 퉁명스러웠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리고 둘러앉은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런 말로 끝맺음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
혈육의 관계 이상 다른 어떤 것도 더 중요할 수 없다고 믿어온 무리에게, 이 말은 귀에 거슬릴 뿐 아니라 지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가족’

오늘날 우리 또한 육신의 모친과 형제들을 제쳐놓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는 성경을 읽으며 혼란스러워진다. 친족관계를 그 무엇보다 강조하는 우리의 미풍양속이 허물어지고 가정이 여지없이 깨지고 있다며 개탄하는 오늘, 혈육의 관계를 질문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사회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메시지로 들릴 수밖에 없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우리의 전래의식과 습속과 마찰하고 싶지 않아 되도록 이 구절을 어물쩍 비켜가거나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려 덮어두고자 한다. 하여 이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도 이를 데 없이 거북한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전래하는 우리의 의식과 습속 안에 진치고 있는 혈육의 관계를 재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선포코자 한 하나님 나라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허물고 깨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전래의 관계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나의 모친이요 나의 형제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자를 일컫는다. 지금껏 얽매여 있던 전래하는 혈육의 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의 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이 ‘나의 모친이며 나의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진정한 뜻에서 예수를 믿는 자이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도, 그리고 로마제국에서도 모두 자기 집안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은 터무니없었고, 유대전통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습속에도 날카롭게 맞섰다. 그런데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건 하나는 주후 2세기부터 몇 차례 로마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절대 다수인 로마 이교도들의 삶과 절대 소수인 기독교인들의 삶이 두드러지게 대비되었다는 기록이다. 로마 이교도들은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기 일쑤였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은 전염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들을 보살폈다. 혈육의 관계와 상관없이 고통당하는 병자들을 보살피며 살려내고자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 연구자의 표현으로,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살벌한 로마 제국 한 가운데 자그마한 ‘축소판 복지 국가’를 세웠던 셈이다.


그들은 혈통의 가족 관계라는 그 좁은 울타리를 넘어, 희생하며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이것이 예수가 언급한 진정한 ‘모친과 형제자매’의 모형이었다.

이기주의자들의 로마에 세우 ‘복지국가’

삶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믿을 것은 집안밖에 없고 집안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기중심의 의식과 행동이 마치 바깥 조건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오히려 절박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움이다. 쉬운 봉사란 없다. 하지만 어려운 때의 봉사일수록 더욱 귀하고 고결하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혈육의 관계조차도, 아니 혈육의 관계쯤이야 넉넉히 넘어서시는 모든 것 위의 하나님, 모든 것에 우선하시는 가장 넓고 높으신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거기에서 우리의 됨됨이가 빚어져 나온다.
오늘 우리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는 예수의 물음 앞에 다시 서 있다.

박영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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