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렘브란트 그림에서 받은 영감, 두 아들을 사랑으로 품는 '아버지'의 자리

사랑의 존재...특유의 부드러운 시강트로 얻은 고독, 소명, 기도, 사랑 등에 대한 치유의 메시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계의 거장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를 그의 전 생애 동안 격동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인생 말년에 후세에 널리 기념할 만한 작품으로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962)을 탄생시켰다. 그림 안에서 오랜 세월 인생을 즐기며 아버지와 집에 대해선 생각도 않던 작은 아들을, 노인이 된 아버지가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맞이한다. 황금빛과 갈색이 어울 어진 명암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되고, 어두컴컴한 배경 화면에 큰 아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사랑과 동정심, 용서와 후회, 미움과 질투…그의 그림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묵상거리를 남기고 있다.


우리 시대 대표적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헨리 나우웬도 오랜 시간 ‘탕자의 귀향’을 묵상하며, 그림 속 인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나이로 치면 그림 속 두 아들보다 아버지 쪽에 가까운 화가와 자신의 위치에 주목했다.


“덥수룩한 수염에 붉은 망토를 걸친 노인을 바라보며 거기에 나를 대입하는 것은 영 거북했습니다.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한 작은아들이나 원망이 마음에 가득했던 큰아들에게는 쉬 동질감을 느끼는 반면, 이미 모든 걸 다 잃고 가진 게 없는 노인, 할 일이라고는 주는 것뿐인 아버지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예순세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로 치자면 나는 두 아들보다는 화가 쪽에 더 가깝습니다. 렘브란트는 기꺼이 자신을 아버지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고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그는 스스로를 아버지의 자리에 두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부족해도 용서 받는 작은 아들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림에는 환한 빛이 흘러넘치는 아버지의 포옹이 묘사되어 있고, 큰 아들은 그 ‘사랑의 동심원’ 바깥에 머물며 빛 가운데로 들어오길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헨리는 그림 밖의 이야기, 즉 작은 아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큰 아들도 화합으로 돌이키게 하는 “한없이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로 그 자신이 나아가는 과정을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묵상집 ‘탕자의 귀향’은 곧, 1세기의 성경 속 이야기 하나와 17세기에 완성된 그림 한 폭,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20세기 한 인간의 교집합인 셈이었다.


영국 성공회 사제인 필립 로드릭(Philip Roderick)은 헨리 묵상의 특징을 “옛 전통과 현대의 시각이 함께 춤을 춘다”는 것으로 요약했으며, “헨리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도 알았지만,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는 묵상의 시간을 즐거운 자세로 임했고, 특유의 부드러운 시각으로 얻은 영적 깨달음을 책으로 펴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춤추시는 하나님’, ‘영적 발돋움’, ‘안식의 여정’ 등 그가 펴낸 40여권의 책들 대부분이 국내에 소개되고 인기를 누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다음은 헨리의 책 ‘사랑의 존재’ 중에서 사랑에 관한 그의 외침이다.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은 아닙니다. 남들이 당신에 대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있는 영향력이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느라 바쁘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자입니다.”

박성희 기자


탕자의 귀환
헨리 나우웬 지음, 포이에마 펴냄

사랑의 존재
필립 로드릭 엮음, 청림출판 펴냄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95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6년부터 노트르담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의 강단에 섰으며, 1986년부터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를 섬겼다. 국제적인 강사, 교수, 성직자로 정신없이 바쁜 행보를 이어가다가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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