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내용을 보면 놀랍게도 모세는 종살이에서 해방된 기쁨에 대해서도, 저들이 누리게 될 황금빛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탈출 공동체에서 세 번이나 거듭 당부하는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잘 지키고 후손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잘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곧 당신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이 날을 기억하십시오.”

유대인들이 아빕 월 열나흩 날 해질 무렵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함께 준비했다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 아이들은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의식에 따라 아버지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오늘 밤이 다른 날 밤들과 다른 까닭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아버지는 유월절에 일어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기억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유월절 식사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들의 역사를 알게 되고, 자기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명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누룩이 들지 않는 빵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자유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저절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 날의 의식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들의 뿌리와, 조상들이 어떤 대의를 위해 싸워왔으며,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년 반복하는 그 의례를 통해 아이들은 자기 민족의 기억 속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은 분들은 ‘너희가 이집트의 노예였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과거는 한시라도 빨리 잊거나 자식들에게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들의 족보를 날조하기도 합니다. 물어보십시오. 조상 가운데 조선시대에 양반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지. 모두가 다 대단한 집안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쩌자고 자기들의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성조들의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곤 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조상들의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이들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기억은 ‘내가 그것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들은 옛날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의 이야기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구원사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자녀 세대들에게 들려줄 신앙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까? 예수 믿었더니 모든 게 잘 되더라는 이야기 말고,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 분투하고 고생하고 손해 본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 오해받고, 따돌림 받은 이야기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신앙을 너무 사사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셨고,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교육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면서도, 우리가 겪은 신산스런 과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적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이 출발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부모 세대들이 살아가는 동안 느낀 기쁨과 슬픔, 공포와 희망,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전해주는 것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인간성의 황무지로 변하지만 울면서라도 그 황무지에 참 사람됨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경쟁과 출세에 관한 이야기가 압도적인 세상이지만, 사랑과 섬김과 돌봄을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자녀 세대에게 들려줄 신앙의 이야기가 아직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이야기를 만들며 사십시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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