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뭐….

물론 있고, 없고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꼭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지요.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서 어쩌면 간절한 무엇이 퇴화되는 듯 느껴집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뭐….

간절히 매달려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간절하게 타들어가는 그 초조하고 안절부절 못하던 시간의 아픔을 모릅니다. 그 시각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놓치고 말겠지요? 하여 우리의 삶은 곳곳에서 잊을 만하면 이런 간절함을 또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삶의 긴장이 필요한 지점에서 끈을 당기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주시는지도 모르겠네요.

문제는 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안의 간절함이 녹슬거나 둔감해지는 것일까요? 혹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함을 외면하시리란 생각 때문은 아닌가요? 간절하게 바라고 기다리고, 또 그 기다림을 위해 내가 치러야 할 고통의 시간이 두려워서 피하는 건 아닐까요? 어느 것이든 우리의 퇴화된 기능 하나, 곧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사라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애벌레는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
“날기를 간절히 원하면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그럼, 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하고는 다르단다.”


나비의 꿈을 포기해버린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애벌레로서 살다가 죽어가는 것에 우리는 또 얼마나 익숙해 있는지요? 올 여름, 무엇보다 나비의 꿈을 회복하는 휴가기간이기를 기도합니다.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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