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 위해 책값 대신 내며 뒷바라지해준 옛 종로서적 이철진 사장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1990년 11월. 결혼하고 10개월 만이었습니다. 아내의 뱃속에는 첫째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우리는 통장에 어머니께서 넣어주신 1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장성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는 것이 성서에 쓰여 있는 길이나 섭섭함과 어려움을 달래기에는 현실의 강이 깊기만 했습니다.
불러주는 이 없어 1년 남짓 집에서 소일로 보내며 밖으로의 활동을 기다리던 중, 모 방송국에 방송 프로그램을 하나 맡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방송에 마음을 두고 있던 터라 마다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맡았지요. 처음 맡는 진행자로서는 다소 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매일 밤 두 시간 방송. 하지만 허튼 방송은 싫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내가 꿈꾸던 방송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연히 선곡과 멘트의 문장 하나에 신경을 썼고, 그만큼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한 문장이라 해서 책 한 권을 다 읽는다고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열 권을 읽어도 쓰여 지지 않을 때가 있고 한 권을 읽어도 여러 문장을 지어낼 수 있지요. 아무튼 깊지 않은 견문과 모르는 세상을 향해 책을 보며 배워야 했습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 교양을 쌓고 시사를 넓히는 것이 방송진행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송 하나에 너무 과장이 심하다 할 수 있겠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방송이 가지고 있는 맹점들에 휩쓸리기 싫었습니다. 또 그것 때문에 무리한 승낙을 한 것이었고요. 방송이 공부는 아니지만, 간절함은 신학생들이 들어도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애썼던 것이지요. 신학서적을 읽어야 했고 다른 양서들도 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인 여유였습니다. 책 한 권을 사기가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어머니께서 마련해주신 100만 원이 그렇게 적은 돈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바가지 하나도 비누 하나도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형편이 그러니 더욱 책이 그리워집니다. 없이 살면 배가 자주 고픈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철지 장로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딴에는 몇 날을 고민하다 비장한 용기를 가지고 종로서적 문을 들어섰습니다. 책을 얻어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장로님은 직원들도 사용이 어려운 회사 주차장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직접 밖으로 나오셔서 자동차를 손수 넣어주시며 맞아 주셨습니다. 물론 소형 중고차였지요. 한 회사의 사장이 그것도 나이 어린 사람의 마중을 그렇게 요란하게 하는 것에 아마 직원들은 의아해 했을 겁니다.
이철지 장로님은 종로서적 사장이었습니다. 점원으로 취직하여 사장까지 오른 것은 다름 아닌 정직과 성실이었습니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 전우익 선생님(<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의 저자)도 평소에 “내 주위에서 이철지가 제일 착해” 하였으니 알 만한 일입니다.
도착하여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그토록 따뜻하게 대해 주신 것은 미안함을 없애기 위한 장로님의 작전이자 배려였습니다. 시간을 끌지도 않으셨습니다. 사장실에 앉자마자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나가서 책을 고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갈 만큼 책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일일이 내 뒤를 따라 다니시며 천천히 고르라고 하시며 책을 고르느라 손이 어려우면 이미 고른 책 뭉치들을 기꺼이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그러기를 서너 번이었습니다. 굳이 밝히자면 족히 40권은 더 되었을 겁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그 때는 진정 그러리라곤 상상을 못했습니다. 종로서적 사장 정도 되면 책을 그냥 줄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겁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책의 대금을 모두 장로님께서 지불하셨다는 겁니다. 하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설사 사장이 마음대로 책을 유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했던 시기였습니다. 몸이 가난하면 마음이라도 넉넉하여야 할진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직 좋은 방송을 하리라는 집념과 소신에 눈이 어두웠지요. 또한 있는 사람들은 좀 베풀어도 된다는 변명 어린 합리화로 방패를 삼았으니 그 무례하고 철없는 짓을 몇 번이나 저질렀던 겁니다. 얼굴 들지 못할 일입니다.
말씀도 없이 생색도 없이 책을 싸 주시던 그 자상함을 어디 비길 데가 있을까요.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 오시며 보살펴 주시던 그 마음 씀을 어디에 두고 견주란 말입니까. 깊은 연민의 정입니다. 양복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신 장로님의 검소함과 잴 수 없는 사랑과 배려를 저는 두고두고 삶으로 갚아야 합니다. 큰 빚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행복한 빚은 없을 겁니다. 내게는 평생을 살며 본으로 삼고 절제와 가르침을 주는 추억이지요. 사람은 추억이 스승입니다.

홍순관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였고, 국악노래와 뮤지컬, 동요,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활동을 해왔다. 1995년부터 정신대할머니 돕기 공연을 시작했고, 최근에는 평화박물관 건립 모금 공연을 하고 있다. 시노래 모임 ‘나팔꽃’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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