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년의사 장기려’를 추천하며…]
손흥규가 ‘청년의사 장기려’를 쓴 이유는 “대개의 종교인들이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들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버린” 장기려를 알리고, “분명히 제2, 제3의 장기려가 나타날 것’이라는 삶의 위안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숙과 발랄한 입담 사이에서

손흥규가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디워’ 논쟁이 한창이던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모두가 ‘디워’로 핏대를 올리고 있을 때 ‘사람의 신화’와 ‘귀신의 시대’를 쓴 소설가 손흥규는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빙자한 멜로드라마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지요. ‘화려한 휴가’를 선악의 대립 구도가 확실한 판타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정한 주역들인 구두닦이, 중국집배달부, 건달, 날품팔이, 가사 노동자, 성노동자, 공장 노동자와 같은 이들이 전면에 그려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손흥규는 우리 문단에서 성석제, 박민규, 이기호, 김종광의 계보를 잇는 입담꾼으로 통합니다. 성석제를 뺀 모두가 30대인 이들 입담 작가들은 기존 질서에 가볍고 발랄한 언어로 저항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손흥규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의 화려한 입담을 통해 결코 발랄하지도 흥겹지도 않은 광주 문제를 끊임없이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가 무색하게 소설만큼은 반드시 컴퓨터 자판을 거부하고 만년필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엄숙과 발랄한 입담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손흥규가 쓴 ‘청년 의사 장기려’에 손이 간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또 다른 장기려를 기다리는 마음

손흥규가 장기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5년 전부터입니다. “지독한 고독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몽땅 남들과 나누며 산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대다수 사람들이 슈바이처는 알아도 장기려는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손흥규는 한 진보잡지에서 장기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걸로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2년 전에는, 장기려를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다산책방을 찾아갔지요.
그가 ‘청년의사 장기려’를 쓴 이유는 “대개의 종교인들이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것들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버린” 장기려를 알리고, “분명히 제2, 제3의 장기려가 나타날 것’이라는 삶의 위안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장기려는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리 먼 과거 시대의 인물이 아닙니다. 반면에 그는 일제시대는커녕 6·25 전쟁 이전의 평양을 경험해 보지 못한 3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손흥규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실체적 진실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쓰되 그 배경이 되는 무대를 오늘의 시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1950년대 초반까지로 한정했던 것입니다.

#장기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그려내

‘작가의 말’을 통하여 손흥규는, ‘예수뿐인 장기려를 떠올리면, 그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제게 있어서 ‘청년의사 장기려’를 읽는 일이 행복했던 것은 손흥규가 저 근사한 레토릭을 공허하게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까지의 장기려에 관한 전기적 글쓰기는 의학적으로 이룬 업적, 그러니까 1943년에 당시 일본을 대표하던 최고 외과 의사 오가와 교수가 실패했던 간의 설상절제술이나, 1959년에 한국 최초로 성공한 간의 대량절제술의 성공이라는 의학적 진보에 취해 장기려 선생에게 목숨을 내맡기고 수술을 받았던 이름 없는 환자에겐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저들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장기려 선생 덕분에 저들이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한 벅찬 감격을 함께 축하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앵무새처럼 장기려 선생의 무의촌 진료를 반복해 말했을 뿐, 선생이 무의촌 진료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1940년대 평양 인근의 빈민촌에도 따사로운 눈길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흥규는 장기려가 살던 당시의 개성, 경성, 평양에 야영 텐트를 설치하고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읽었고, 저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손흥규가 그려낸 1940년대의 평양은 너무도 상세하여 당시의 평양이 거리에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또한 저는 손흥규가 우리 모두가 익명으로 처리한 1940년대의 낮고 천한 평양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과 좌절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말을 할 때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흥규가 창작한 인물인 종기의(腫氣醫) 박 의원과 그의 아들과 장기려의 기막힌 인연, 평양의 빈민들을 위해 헌신한 여인 백선행(1848-1933), 그리고 파업을 주도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빈민굴에서 죽었던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감동적인 장례식 이야기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장기려에 기대어 참 세상을 꿈꾸다

약간의 아쉬움도 있습니다. 장기려 주변 사람들의 주변 채록까지 포기하면서 그 시대에 야영을 했던 손흥규의 기록에서 몇 가지 ‘팩트’의 오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는 전문의 제도가 없어서 모든 의사들이 두루 진료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장기려 선생이 출산을 도운 일을 특별하게 서술한 것,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다시 루머로 후퇴한 것 등은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추천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이름 없고 억울하게 차별당하는 우리 이웃에게 장기려의 진면목을 가장 잘 전해주는 책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기독교인이든 천도교인이든 혹은 아무런 종교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든, 여자든 남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물처럼 흘러들어 섞일 수 있는 것. 그런 게 바로 진정한 해방이 아닐까.”(270쪽)
손흥규가 장기려의 입을 빌려 말한 해방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저 또한 장기려에 기대어 이런 해방을 꿈꿉니다.

지강유철
장기려 평전 ‘장기려 그 사람’(홍성사)의 저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및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했으며 월간 ‘인물과 사상’의 객원기자 등으로도 활동한다.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 등의 책을 썼다. 홈페이지=www.yuche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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