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책] 거침없는 은혜 | 도널드 맥컬로우 지음, IVP 펴냄
20개의 뒤집혀진 그림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정한 은혜의 의미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단순히 윤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때로는 복잡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요구하기 때문이다. 쉽고 편한 게 아니라 복잡하고 불편하게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은혜도 그렇다.
흔히, 은혜는 좋은 것이라고 한다. 공짜로 베풀어지는 것이니 안좋을 수가 없다. 이 책에 실린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깜박하고 의료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했는데 아직 ‘유예기간’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을 들을 때, 사고를 쳤는데 배우자가 이제 거실 신세를 끝내고 침실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낼 때, 나 때문에 감정이 상한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할 때, … 술이 깨지 않은 채로 교회에 갔는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설교자가 안심시켜 줄 때가 그렇다. 그럴 때면 우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를 제법 진지하게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종의 ‘가벼운’ 은혜다. 깜짝 선물처럼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이처럼 가볍지가 않다. 무겁다.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얼마 전, 세간의 화제가 됐던 영화 <밀양>은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에서 전도연은 아들을 죽인 범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말에 말 그대로 ‘홱 돌아버린다’. 어떻게 저런 인간 쓰레기를 하나님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일까? 착한 놈이나, 나쁜 놈이나 구별없이 되나가나 받는 용서라면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라고 전도연은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아예 격분해 버린다.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온다. 바로 ‘탕자의 비유’다. 못된 아들은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해 잔치를 베푼다. 여기까지는 좋다. 방탕한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 또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을 일이다. 그런데, 그 집에 있던 또다른 아들의 입장은 어떤가? 성실하게 집에서 일을 하던 형의 입장이다. 이런 분통터질 일이 따로 없다.

그렇다.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딜레마를 갖고 있다. 그래서 아주 엄밀하게 따지면 사람들은 은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쉽게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도 없으니 여기서 괴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전략’이 나온다. 그 전략은 바로 ‘은혜를 거부하지 말고 그냥 길들이는 것이다. 은혜를 적극 존중하라. 공식 고백 속에 안치하고 종교 예식으로 칭송하라. 단, 적당한 한계선 안에 두라. 나머지 삶과는 거리를 두라. … 늘 은혜를 한정하고 설명하라. 필요하다면 은혜에 대한 설교도 괜찮지만 항상 강력한 ‘그러므로’로 끝맺으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분이 할 일은 이것입니다.”’

이런 얄궂고 불편한 진실을 콕콕 찔러대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스무 편의 뒤집어진 그림’을 통해 은혜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 뒤집어진 그림은, 실제로는 뒤집어진 그림이 아니라, 거꾸로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거울일 뿐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당신의 눈이 거꾸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뒤집어진 그림을 따라가다 뒤집어진 자신의 시선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는 소중한 발견이고, 그 발견의 끝에는 존 뉴턴이 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곡이 놓여져 있다.
저자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이며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및 솔트레이크 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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