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으로 모든 것과 단절된 세월 보내면서도 교회 개척하고 환우들 희망 일궈

고 김신아 장로.
1945년 해방되던 그 해,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집을 떠나 대구의 선교사병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 곁에 있어선 안 되었다. 한센병(Hansen's disease)은 그런 아픈 역설을 요구하는 병이었다. 모든 활동을 멈추기까지 그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에서 살았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알 수 없는 우울함과 따뜻한 부모의 관심, 그 사이에서 그는 신앙생활에 매달렸고, 톨스토이와 간디, 슈바이처를 읽는 데 몰두했다. 기도를 해도 예수님처럼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맞으려는 기도였는지 모르겠다.

# 단절의 병 ‘한센병’

병이 몸으로 드러나고 사람들로부터 단절되어 가던 그 무렵이었다. 기억에도 뚜렷한 질문 하나가 있었다. “나는 왜 이런 병에 들었을까? 도대체 누구의 무슨 죄일까?” 부모를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향하지도 않았다. 그의 질문은 하나님을 향해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이천 년 전 이스라엘의 어느 병자에게 주신 말씀은 어이없게도(?) 그를 향하여 다가왔다.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실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아픔이 시작된 그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햇살이 소는 듯했다. 희미하지만 뚜렷한 희망이 예언처럼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나 보다.”
그런 어둠의 순간에도 그는 밝았다. 어디서 온 빛인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뚜렷하지만 그의 삶은 그렇게 밝고도 긍정적이었다. 병원 교회에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찬양대를 구성해 악기를 가르쳤다. 거기서 그는 중학교를 만들었고, 주민들에게는 계몽운동 차원에서 유인물을 만들어 보급하느라 손에는 늘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 마치 마른 장작에 붙은 불 같았다. 병으로 세상과 단절된 뒤 안으로만 움츠렸던 끼들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진 듯했다.
2년 동안은 병원 밖에서 살았다. 공동묘지를 떠도는 환자들에게도 자신의 손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내린 선택이었다. 병원의 쾌적한 환경을 떠나 그들과 함께 공동묘지 부근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깐 뒤 거기서 생활했다. 이것이 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었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는 55년이 흐른 지금엔 큼지막한 예배당까지 갖춘 교회로 발전했다.

# 거듭되는 단절 ‘실명’

그 무렵 점점 나빠지던 시력이 더욱 악화됐다. 집에 있을 때 먹던 약 속에 수은이 너무 많았던 게 탈이었다. 급기야 서른이 되었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아야 했다. 실명, 이제 빛으로부터의 단절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로부터의 떠남이었다. 가족을 떠나 병원에 들어와서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던 것처럼, 좌절은 또 다른 희망을 잉태하는 것일까? 실명하고 나서 그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경험을 했다. 안으로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영적인 눈’이라고 했다. 그에게 실명과 개명은 마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의식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에도 빛은 타오르고 어떤 암울한 환경이든 사르고 밝게 빛났다.
실명 후 서른세 살 되던 해 결혼을 했고 그 무렵 그의 인생을 여기까지 몰아온 병도 깨끗이 완치됐다. 완치된 사람들 가운데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위해 병원을 떠났다. 그러나 완치되더라도 후유증 때문에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다시 소록도로 보낸다는 방침이 내려왔다. 소록도는 지리적인 섬인 동시에 심리적인 섬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온통 조롱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눈까지 뽑혀 블레셋 군대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삼손처럼 처절해 보였다. 자신의 신앙을 칭송하던 많은 이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비웃음이 머무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안은 예의 그 긍정적인 빛이 타올랐다. “소록도 행은 나에게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는 땅일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재촉했다.

#소록도로 떠나다

소록도에서도 그의 삶은 한결같았다. 교회에서 찬양대를 만들고 설교를 했으며, 성경고등학교에선 음악을 가르쳤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캄캄한 세상에 그가 뛰어들어 삶으로 다가서면 환하게 드러났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본 것이다. 그럴 때면 소록도를 둘러싼 넓은 바다조차 소록도의 소망을 지키는 굳센 수비대처럼 느껴졌다. 그의 삶이 뿌려진 소록도는 이제 머나먼 섬이 아니었다.
그렇게 칠 년이 흐른 어느 날 정착하러 떠난 사람들이 그를 찾아 소록도까지 왔다. 그들끼리 터를 잡고 정착에 들어갔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거지굴이나 다름없는 마을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손을 잡고 무턱대고 도와달라는 말만 거듭했다. 그는 다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면 교회를 세워봅시다.” 교회가 세워지면 정착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구해 서른 평 남짓 되는 교회당을 짓고 거기서 우선 목회를 시작했다. 충원교회의 시작이었다. 정확히 10년 뒤 이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이 들어섰고, 마을은 자연스럽게 정착을 이뤘다.
그렇게 환한 빛으로 한없이 어두운 길을 걸어내었던 사람, 김신아 장로가 지난 9월 2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났다. 여든일곱의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 하였다.

박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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