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고의 도구여서 인간의 사고 지평과 별개일 수 없다. 동서양의 사고방식도 언어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다. 가령 서양에서는 더욱 친밀한 교류를 위해 ‘분명히’ 하자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적당히 잘해봅시다’라고 말하면 앞으로 잘 지내자는 의미에 더 가깝다. ‘적당히’라는 단어가 ‘분명히’보다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말로 통용되는 것이다.

‘우리 앞으로 분명하게 합시다”라고 말하면 서양에서는 대체로 교류를 잘 맺어나가자는 뜻으로 통용되지만, 동양에서는 관계를 어느 일정한 선에서만 유지하거나 그만두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분명히 하자는 말은 서양의 합리적이고도 계약적인 사고방식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기준과 대응방식을 정해두고 동일하게 적용하는 공평과 합리성의 정서가 배어 있다. 그러나 동양의 정서에서는 책임 소재가 분명해질 때까지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에게 흔히 ‘적당히 하라’고들 말한다. 그쯤에서 잘못한 사람을 그만 용서해주라는 권유이다.

‘적당히’라는 말은 ‘합당히’ ‘적절히’ ‘적합하게’라는 의미는 물론, 더 나아가 이해와 용서의 정신이 담겨있는 말이다. 이러한 말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배경에는 정확한 사실 여부에 종속되기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정서가 들어있다.
이렇게 ‘적당히’와 ‘분명히’라는 말에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가 담겨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든가, 더 우월하거나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동양의 ‘적당히’와 서양의 ‘분명히’에는 서로 존중할 만한 매력이 있다. ‘분명히’에 담긴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적당히’에 담긴 포용적인 사고방식을 서로 통(通)하며 배워나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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