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와 '예수 더 알기 원함은'

찬양할 마음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밥 먹기 싫을 때가 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녀도 귀찮을 때가 있듯이, 마음이 무겁고 냉랭하여 찬양이 영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가까운 누군가에게 물어봤다. “밥 먹기 싫다고 안 먹을 수 없지 않느냐?”면서 “먹다 보면 입맛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식사의 경우 분명히 그럴 때가 있다. 밥 안 먹는다고, 입맛 없다고 투덜거리다가 몇 술 뜨고는 입맛이 돌아와 두 그릇이나 먹고 눈총을 받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먹는 것처럼, 찬양도 당장에 내키지 않아도 하다 보면 진심으로 몰입할 수 있다는 이런 주장을 ‘찬양 식사설’이라 불러보자. 찬양이 결국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측면을 부각시킨 주장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입장이 ‘찬양 세금설’이다.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께 찬송을 드려야 할 성도의 ‘마땅한’ 바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어쨌거나 둘 다 일단 억지로라도 찬양을 하라는 권고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찬양은 입을 열어 그냥 소리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밥이야 먹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먹어도 입에 넣으면 유효하다. 세금도 그렇다. 그러나 찬양할 마음도 내키지 않는데 ‘입을 열어 공기에 진동을 일으키는’ 것을 과연 찬양이라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다. 찬양에는 우리의 입만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한다. 그런데 진심이라는 것이 과연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인가, 그렇게 요구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시선을 제대로 둘 일이다. 내 기분이 아니라 사실에 주목하자. 부모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그분들에 대해 마음이 냉랭해진다고 하자. 그러면 어머니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불러일으키려고 머리를 쥐어뜯어야 하나? 아니면 ‘어머니는 날 사랑하셔’라고 계속 주문처럼 외워야 하나? 그건 최면이고 세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간단하다. 어머니가 날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셨는지 하나하나 꼽아보면 된다. 그러면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내 시선을 끊임없이 요동치는 내 감정에서 옮겨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객관적인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찬양도 그렇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꼽아보는 거다.
489장(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복을 돌아보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이 좀 열리면 506장(예수 더 알기 원함은)을 펼쳐 본다. 그분을 더 알 때 그분이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임을 더욱 깨닫게 되고, 그럴 때 더욱 진심어린 찬양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